지인 소개로 음악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일하는 그와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는데,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적어본다. “지금 미국 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계 인사가 누구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바로 ‘스포티파이 큐레이션 서비스 담당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 만하다 싶었다. 스포티파이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다. 스트리밍이 곧 진리인 지금 시대에 이곳에서 제공하는 큐레이션 서비스 선곡 담당자라니, 이건 뭐 음반사들의 메인 홍보 타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후 “나도 한번 경험해봐야겠다” 싶어 스포티파이에 접속해 결제 버튼을 눌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충격이었다. 이건 단순한 큐레이션이 아니었다. 마치 “내 취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음악 친구”를 만난 느낌과 비슷했다. 어쩜 이렇게 내가 좋아할 만한 곡들만 뽑아서 추천해주는지, 가끔씩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며 주위를 돌아보곤 했다는 건 물론 과장이다. 어쨌든, 스포티파이 큐레이션을 만난 뒤로 나는 음악 선택에서 실패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EPA미국 음악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포티파이 큐레이션 서비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10대와 20대에 걸쳐 나는 수시로 실패했고, 피 같은 내 돈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뤘다. 명반이라고 칭송받던 앨범이 별로인 경우가 있었다. 당대 음악평론가들이 쓴 글과 추천을 총동원해 사고 싶은 음반 리스트를 쭉 적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아껴 보물을 찾듯이 하나둘 컬렉션했다. 그중에서는 대박도 있고, 중박도 있었으며, 가끔씩은 쪽박이 출연해 억장이 무너졌다.

생각해본다. 과거처럼 실패할 일이 없는 현재의 음악 듣기란 과연 좋은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꼴과 묘하게 맞닿아 있지 않을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생활이란 일종의 유예기였다. 사회라는 전쟁터에 입성하기 전에 준비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완충지대였다. IMF 외환위기라는 암흑기가 있었음에도, 1990년대 중·후반까지 청년들은 미래에 대해 묘하게 긍정적인 감각 같은 것을 공유했다고 기억한다. 설령 실패한다 할지라도 ‘뭐, 어떻게든 잘 되겠지’ 싶었는데, 대부분 실제로 어떻게든 잘 되어 지금까지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시대의 음악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더 이상 실패는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이른바 ‘달관 세대’라고도 불리는 청춘에게 최우선 가치는 오로지 생존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에,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시대에 음악 듣기에서 실패란 곧 시간 낭비나 다름없다.

내가 이제야 큐레이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거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할 실패에 대한 확률이 계산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서비스는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 대부분을 담당할 게 거의 확실하다. 이미 등장한 인공지능 스피커와 마찬가지로 큐레이션은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음악 듣기에서도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이런 흐름이 과연 어떤 미래를 그릴지, 자못 궁금하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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