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바다와 섬들을 포기한 해양 천시 정책이 결국 조선이 망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쇄국은 대원군만의 정책이 아니었다. 조선은 오백 년 왕조 내내 쇄국의 나라였다.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공도(空島)와 해금(海禁) 정책으로 조선은 세계와 교류를 포기했다. 공도 정책을 어기고 섬에 숨어사는 백성들은 반역죄로 다스렸다. 주동자는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관노비로 보냈다. 많은 섬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시 거주가 허락됐지만 일부 섬은 19세기 말까지도 주민 거주가 금지됐다. 울릉도는 1883년, 여수 금오도는 1885년, 통영 욕지도는 1888년에야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섬은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1885년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을 조선 정부는 러시아를 통해 전달받고서야 알았다. 거문도 점령 전 영국 군함 사마랑호는 1845년 6월부터 8월까지 조선 남해안을 탐사했다. 1816년, 영국 함대 3척도 조사활동을 한 뒤 〈조선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황당선이라 불린 중국 청나라 어선 수천 척도 조선 바다의 어류를 싹쓸이했다.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
박정석 지음
서강대학교출판부 펴냄
조선 바다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상황에서도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승리 후 일제는 조선의 어업권을 장악하고 섬들과 해안 도시에 일본인을 ‘식민’시켜 이주 어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어업 자원 수탈과 함께 해상으로부터 조선을 포위해 들어가기 위한 전략이었다. 박정석의 〈식민 이주 어촌의 흔적과 기억〉은 조선이 해양과 섬들을 방치하는 동안 일본이 섬들과 항·포구에서 어떻게 조선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했는지, 그 역사를 복원해냈다. 욕지도와 거문도, 나로도에, 구룡포와 장승포 등에 일제는 식민 이주 어촌을 만들었다. 이주 어촌에서 일본인들은 우세한 자본력과 어업기술로 식민화의 첨병 노릇을 했다. 섬과 해양을 포기했던 조선의 정책 탓에 섬과 해양은 쉽게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섬과 해양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은 여전하다. 섬의 주민들은 여전히 2등 국민 취급을 받는다. 동일 거리당 여객선 요금은 KTX보다 네 배나 비싸다. 정부는 그저 섬의 토건에만 관심을 둘 뿐 섬 주민들의 삶을 돌보는 데는 무관심하다. 재벌 토건업체들이 주도하는 방파제나 다리 건설에는 수조, 수천억원씩 혈세를 퍼붓는 정부가 정작 섬 주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여객선 공영제 같은 정책에는 쓸 예산이 없다고 회피한다. 30년 전 2000여 개나 되던 유인도가 이제는 500여 개로 줄었다. 현대판 공도 정책이다. 섬과 바다를 버렸을 때 우리가 어떤 비극에 직면하게 될까. 이 책을 통해 예측 가능하다.

기자명 강제윤 (시인·섬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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