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라 씨 자신도 난민 신청을 해놓았지만 아직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상태이다. 뚜라 씨는 한국에 체류한 지 14년이 넘었다. 미얀마 대학에서 기계학을 전공하며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부 탄압을 피해 1년 동안 숨어 지내던 그는 더 이상 버마에서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집회와 시위는 물론이고 학생들끼리 작은 모임을 여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잠시 정치적 박해를 피하고 견문이나 넓혀보자는 생각에서 뚜라 씨는 1994년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기술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해 참 좋다고 생각했다는 뚜라 씨는 한국에 와서 실망도 컸다고 한다. 경기도에 있는 한 제조업체 프레스 기계가공 분야에서 일을 했는데, 일도 힘들뿐더러 인간으로서 따뜻하게 대우받지 못해 너무 외로웠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현실을 그는 견디기 힘들었다.
뚜라 씨는 직장에서 월급 체불 등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 주위에서 억울하게 차별받는 동료들을 도우면서 한국에서마저 인권운동에 매진하게 됐다. 2003년 버마 민주화 단체인 ‘버마행동’을 조직해 버마 내부 상황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한편, 2004년부터는 이주노동자 방송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이주노동자 관련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맡았다.
뚜라 씨는 이제 ‘합법 체류 기간’을 넘긴 불법 체류자다. 2004년 5월 법무부에 난민 지위 인정 신청을 했지만, 아직 심사 중이다. 번역 아르바이트와 강의 등으로 생계를 잇는 그는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을 하기는커녕 자기 생활도 궁핍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법무부에서 ‘버마행동’ 소속 회원 8명에게 전달한 난민 인정 불허 사유서에는 “주목할 만한 반정부 활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귀국 시 박해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라는 문장이 담겨 있다. 뚜라 씨는 “난민인정 신청을 한 2004년부터 4년간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며 지냈는지 제대로 알아봤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반박했다.
‘버마행동’의 회원들은 이제껏 한국 내 다른 민주화 단체와 연대해 ‘프리버마 캠페인’을 펼치며 시위대를 향한 군부의 만행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다. 이들이 버마에 돌아가면 군부독재 치하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인도적 조처’가 필요하다. 이들이 난민으로 인정돼 뚜라 씨의 무거운 어깨가 가벼워지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