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에게는 두 개의 8일이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이 끊어지는 데 걸린 8일(1762년). 그로부터 30여 년 후. 재위 19년째인 을묘년(1795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死甲)을 맞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을 찾은 ‘을묘원행’의 8일. 전자는 사도세자의 8일, 후자는 정조의 8일이라고 부르자.

그동안 대중문화 영역에서 영?정조는 ‘사도세자의 8일’을 중심으로 배치되곤 했다. 그 틀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비정한 아비였고, 혜경궁 홍씨는 그것을 애닯게 지켜보아야 했던 지어미였다. 그들이 주인공인 드라마 속에서 정조는 항상 조연에 머물렀다. 아비의 비극적인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린 왕손, 혹은 신하의 충직한 보필 덕에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는 위태로운 군주가 정조에게 맡겨진 배역이었다. 단적으로 문화방송의 조선실록 시리즈 ‘조선왕조오백년’에서 영?정조 시대의 타이틀은 혜경궁 홍씨의 동명 저서에서 따온 〈한중록〉이었다.

2007년, 정조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정조 혹은 정조 시대와 관련된 책들이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나왔다. 명패도 케케묵은 정조가 아니라, 이산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으로 귀환했다.

가장 화려한 귀환은 MBC 창사 46주년 기념 드라마 〈이산〉이다. 여기에 소설 〈이산〉, 정조  시대에 천착한 소설가 김탁환의 3부작 완결판 〈열하광인〉, 정조 시대 천재 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대결을 그린 이정명 소설 〈비밀의 화원〉, 이상우 소설 〈정조대왕 이산〉, 강신재 소설 〈이산 정조대왕〉이 가세했다. 7월에 출간된 이상우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산 정조대왕〉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소설과 드라마, 만화책까지 정조 '붐'

‘사도세자의 8일’이 과거 숱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듯 ‘정조의 8일’에 주목하는 작품도 늘었다. 대표 작품이 올해 11월 케이블 CGV에서 선보일 10부작 미스터리 시리즈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에 행차한 을묘원행을 소재로, 원행 8일 동안 정조 암살 기도가 벌어진다는 설정 아래 이를 막아내기 위한 정약용의 활약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지난해 출간된 오세영의 소설 〈원행〉이 원작이다. 이인화의 화제의 소설 〈영원한 제국〉을 영화로 만들었던 박종원 감독이 연출을 맡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만화책도 가세했다. 베스트셀러 인기 시리즈물인 ‘노빈손 시리즈’가 한국사 시리즈를 선보이는데, 첫 책이 〈노빈손, 정조대왕의 암살을 막아라〉이다. 노빈손이 정약용의 제자가 되어 정조 대왕의 암살을 막기 위해 활약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아동용 만화책으로까지 나온 것이다. 흡사 정조와 정조가 아꼈던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정조와 대립했던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논쟁을 벌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9월17일부터 방영 중인 MBC 사극 〈이산〉은 공중파 사극다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사도세자의 8일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춧돌을 놓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우선, 사도세자가 기행을 일삼던 광인이라는 정보가 없다. 뒤주에 갇히기 전 상황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냥 뒤주에서 출발해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어 정조의 즉위부터 치세, 그리고 죽음까지 온전히 이산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 〈이산〉 연출을 맡은 이병훈 프로듀서는 “홍국영의 활약상을 다루면서 정조의 즉위기를 망라했으나, 정조를 제대로 조명할 기회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제대로 군주 노릇을 해야 했던 이산의 인간적 번민과 치적을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82쪽 상자 기사 참조).
 

ⓒ뉴시스정조가 1795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死甲)을 맞아 가진 화성행차를 일컫는 ‘을묘원행’(위)이 많은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1795년 을묘원행으로 기록되고 있는 ‘정조의  8일’은 왜 중요한가. 정조는 간난신고 끝에 왕위에 오른 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해 정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선언이 힘을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재위 기간 어렵사리 시도한 숱한 개혁의 결과와 그 주체들을 한자리에서 과시하는 행사가 바로 을묘원행이었던 것이다.

사학자  한영우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8일간의 화성 행차는 화성을 무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친위 세력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정조의 거대한 정치 드라마였다”라고 평가했다(〈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 그 시위는 한양에 잠복된 구 질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혼신의 도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도전은 기득권 층의 은밀하고도 격렬한 반발을 불렀고, 정조의 급서 이후 급격한 반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정조를 픽션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1993년 출간된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산은 대중문화 영역에서 쉽게 계승자를 찾지 못했다. 대신 1990년대 말부터 영?정조 시기에 관한 연구 성과가 대중적인 저작의 형태로 봇물을 이루었다. 1998년 박광용 교수는 〈영조와 정조의 나라〉를 펴내면서 ‘조선의 진정한 큰 임금은 세종이 아니었다. 조선의 르네상스 76년을 이끈 두 대왕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 시대를 움직인 사람들을 보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후 유봉학, 박현모, 정옥자로 이어지는 전문  연구자들이 각각 역사와 정치, 국문학 영역에서 정조 시대의 의미를 대중서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쏟아진 이덕일의 시리즈 〈송시열과 그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사도세자의 고백〉 등은, 정조 시대의 지형과 그의 사람들을 더욱 생생하게 복원시켰다.

그러니까 연구자들 사이에 정조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탐색이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히 시도되었고 일정 부분 합의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뒤늦게 지금 그 관점에 기반한 생산물이 쏟아지고 있다. 문화평론가 이영미씨는 이 현상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절되는 개혁에 대한 아쉬움이 드라마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83~84쪽 참조).

지난해 소설 〈영원한 제국〉 개정판이 나온 데 이어 올해 9월 정조 관련 소설이 쏟아져나왔다.

“개혁 군주로서의 이미지 획일적” 비판도

한편 개혁 군주 정조에 대한 유보 없는 찬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최근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정조는 과연 개혁적이었는가?’라는 기고 글을 통해 현재 정조에 대한 해석이 너무 획일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근본적 개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보면 결국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되풀이한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이다.

김씨는 “〈한성별곡-정〉 〈이산〉 〈정조 암살 미스터리〉로 이어지는 세 편의 드라마가 모두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 그리고 반개혁 세력에게 핍박을 당하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지만, 그가 행한 획기적 정책들은 사실 강한 왕권이나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복고적 행태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정조가 암살된 것은 수구파의 책동이라기보다는 개혁파의 정조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소설가 김탁환씨는 이런 메시지를 더 밀고 나간다. 그는 최근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에 이어 〈열하광인〉을 내놓아 이른바 정조 시대 3부작을 완결지었다. 〈열하광인〉은 ‘개혁을 추진하던 정조가 왜 ‘문체반정’이라는 반동적 조처를 취하면서 돌연 절대 군주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김씨는 “혁신의 기치를 반성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수구와 혁신에서의 양자 택일은 이미 낡은 도덕적 틀이다. 이제는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를 더 깊이 따져보아야 한다. 1792년 정조의 혁신이 있었고, 백탑파(금서가 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모임)의 혁신이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한 몸인 듯했으나 결국 다른 미래를 꿈꾸었음이 분명해졌다”라고 말한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내내 주자의 마니아였고, 주자의 세계관으로 조선을 ‘품격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을 뿐이어서 어느 순간 근본 개혁을 꿈꾸며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정조는 결국 왕, 자신의 편일 뿐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열하광인〉 김탁환 "왕은 왕의 편일 뿐"

그는 자신의 작품이 현재적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정조의 눈부심은 정조 사후에 펼쳐진 19세기 초반의 엄청난 암흑으로 인한 부분이 크다. 한국 사회가 1987년 이후  2007년까지 20년 동안, 어쨌든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이룩한 것들이 한순간에 암흑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 암흑 속에서 과거의 한때는 아름다웠노라고 한심하게 추억하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 작품을 썼다”라고 말했다.

정조가 펼친 개혁의 한계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미 지적되어온 바이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의 저자 박광용의 문제 의식을 보자. 그는 1998년 이미 “정조는 진보적 개혁을 꿈꾸면서 보수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것이 정조 개혁의 한계이다”라고 지적했었다. 그러나 박 교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조 개혁은 그 성과가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 지식인들에게 급진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넣어줌으로써 그 지식인들의 업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 함께 사는 복지사회’라는 방향을 지닌 다산 정약용의 저술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등을 예로 꼽았다. 

개혁이라는 말이 이미 염증과 양가 감정을 빚어내고 있는 지금, 대중은 대리 만족할 대상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철이 든 순간부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개혁을 시도하고, 변화를 꿈꾸던 숱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정조와 그의 시대에 매료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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