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혁명 이래 미국은 쿠바에 대해 침공, 지도자 암살 시도, 경제봉쇄, 정치적 고립, 반정부 세력 지원 등 모든 일을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다. 10명의 미국 대통령이 모두 “쿠바 망해라! 망해라!” 기도하는 만평까지 나올 만큼 미국은 일관되게 쿠바의 몰락을 바랐다.

미국이 그간 공들여서 추진해온 반정부 세력 양성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미국의 강경조치가 불러온 역효과가 있다. 부시 정부(2001~2009)가 ‘자유쿠바지원위원회(CAFC)’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예비 정부를 세우고, 쿠바로 향하는 여행과 송금을 제한한 적이 있다. 그 같은 강경조치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쿠바 정부만이 아니었다. 쿠바 내의 반정부 인사들도 이런 조치들이 쿠바 국민에게 반미 감정만 키우고, 쿠바 정부의 발언권을 더욱 키워준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강경조치는 오히려 쿠바 내부의 반정부 세력이 국민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로막았다.

ⓒAP Photo3월2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 아바나의 혁명광장에서 열린 환영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이민법은 의도와 달리 반정부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했다. 미국의 쿠바 이민정책은 매우 특별했다. 쿠바를 떠나겠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체제의 정당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판단 아래 미국은 자국에 오는 쿠바 이민자 모두에게 망명자 자격과 영주권을 제공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 법이 불법 이민을 부추긴다고 비판해왔다. 그는 쿠바 이민자에게 주는 특권을 중남미 국적자 모두에게 적용하면 “미국 인구의 반이 중남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또한 피델은 쿠바 이민자가 늘어나면 체제의 문제라면서, 멕시코나 다른 중남미 국가 출신 이민자가 늘어나면 왜 체제의 문제로 다루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가 보기에 쿠바 이민자 문제는 쿠바 혁명 체제가 아니라 제3세계와 제1세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가 언급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사실 쿠바 정부는 미국의 이민법을 역으로 이용해 체제 불만 세력을 대거 미국으로 보내버리곤 했다. 압력솥에서 수증기를 배출하듯, 쿠바 내부에 누적된 불만 세력을 대규모로 송출했다. 혁명 초기(1959~1962)에는 27만명, 미사일 위기 이후 1965년에는 30만명, 1980년에 12만5000명, 그리고 1994년에는 3만명 이상이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미국은 이 같은 이민 물결을 ‘쿠바 탈출’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쿠바로서는 체제 불만 세력의 제거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쿠바 내부의 반정부 세력은 소수가 되었고, 반정부 구호는 플로리다 해협 건너편에서만 더욱 거세졌다.

비판은 오히려 미국을 향하기 시작했다. 쿠바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일은 갈수록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냉전 이후 전 세계는 미국이 쿠바를 상대로 벌이는 금수조치를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해왔다. 2008년 10월 유엔 총회에서도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 반대 결의안에서 미국 편을 든 나라는 이스라엘과 태평양의 도서국가 팔라우뿐이었다. 게다가 2000년대에 중남미 주요 10개국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는 ‘좌회전’ 시기(1999~ 2015)에는 쿠바가 중남미 국제무대에 초대되는 반면, 오히려 미국이 배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쿠바 봉쇄는 미국 외교의 실패 사례

미국 내부에서도 비판이 고개를 들었다. 미국의 재계는 무역과 투자의 기회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쿠바계 이민자 공동체 내부에서도 기류가 변했다. 혁명에 반대해 망명을 택한 보수적인 구세대와 달리 1980년 이후 이민을 온 새로운 세대는 쿠바와 미국의 화해를 바란다. 이래저래 미국이 1959년 이래로 유지해온 정책을 계속 지탱하기란 어려워졌다. 효과도 없고 지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Reuter2015년 8월14일 다시 들어선 쿠바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에서 성조기 게양식이 거행되고 있다.
100여 년 전 쿠바 독립투사이자 시인이었던 호세 마르티는 식민 모국인 스페인 제국은 물론이고 쿠바를 호시탐탐 노리는 미국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5년간의 미국 망명 시절을 겪은 뒤 “괴물 속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에 그 내장을 잘 안다”라면서 미국을 경계했다. 마르티는 쿠바가 스페인과 미국 모두에게서 독립하기를 진심으로 갈망했고, 쿠바가 독립국가로 인정받기를 염원했다. 그 염원을 담아 오늘날 쿠바 국민 모두가 부르는 노래 가사로도 잘 알려진 시 한 편을 남겼다.

“하얀 장미를 기르네/ 7월에 마치 1월처럼/ 내게 손을 내미는/ 신실한 친구를 위해/ 내게서 심장을 빼앗는/ 비정한 이를 위해서도/ 엉겅퀴도 쐐기풀도 아니고/ 하얀 장미를 기르네.”

마르티는 손을 내미는 친구에게도, 심장을 빼앗는 사람에게도 하얀 장미를 보내겠다고 노래했다. 친구에게는 우정의 선물로, 적에게는 평화의 선물로 하얀 장미를 선사하겠다는 뜻이다. 쿠바가 내민 흰 장미를 미국은 쿠바 혁명 이후 57년 동안 거절해왔다. 그런데 미국이 그 평화의 선물에 답을 하는 날이 왔다.

2016년 3월20일 오후 4시19분, 부슬비가 내리는 쿠바 수도 아바나의 호세마르티 국제공항에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이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부인과 두 딸, 장모도 함께였다. 1959년 혁명 이래 쿠바를 처음으로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오바마 가족은, 비가 내리는 아바나 구시가지를 거닐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 가득한 그곳에서 오바마 일행은 땅에 고인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시내를 산책했다. 오바마 가족을 보기 위해 아바나 시민들이 연방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AFP PHOTO12월4일 카스트로의 유해를 실은 운구 차량이 지나가자 쿠바 국민들이 ‘피델 만세’를 외치고 있다.
2년 전인 2014년 11월27일, 쿠바 지도자 라울 카스트로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양국이 동시에 다시 외교관계를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그때부터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일까지 만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양국 대사관이 각각 아바나와 워싱턴에 문을 열었고, 아바나에는 성조기가, 워싱턴에는 쿠바 국기가 각각 게양되었다. 양국 사이에 화물을 실은 상선이 오가더니 곧 승객을 실은 크루즈 여객선도 다녔다. 양국 사이에 처음으로 우편이 오가더니 곧 플로리다발 민간 항공기가 쿠바에 도착했다.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원들이 방문하고, 미국 국무장관도 찾아오더니 이제 오바마 대통령까지 아바나를 방문했다. 미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했다. 쿠바도 이런 미국의 노력에 답하는 의미에서 정치범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방문 둘째 날 오바마는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연설을 하려고 아바나의 유서 깊은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사이좋게 서 있는 쿠바기와 성조기를 배경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하얀 장미를 기르네.” 오바마가 호세 마르티의 시구를 서툰 스페인어로 발음하자 대극장을 가득 채운 청중이 박수를 보냈다. “호세 마르티는 이 유명한 시에서 우정과 평화의 인사말을 친구에게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적에게도 건넸습니다. 오늘 미국 대통령인 저는 쿠바 민중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넵니다.”

오바마 다녀간 뒤 쿠바에 ‘오바마니아’ 현상

57년 만에 미국이 적국 쿠바에 하얀 장미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청중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커지고, 몇몇은 “브라보!”를 외쳤다. 쿠바 국민들의 애송시로 운을 뗀 오바마는 “냉전의 마지막 흔적을 파묻기 위해 여기에 왔다”라고 방문 목적을 밝혔다. 또 “미국이 그간 해온 일은 더 이상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고립정책은 21세기에는 무용지물이고, 경제봉쇄 정책은 쿠바 민중을 돕기는커녕 피해만 입혔다”라고 시인했다. 그는 연설 내내 미국과 쿠바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인정하고 협력하면서 변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스페인어로 “쿠바의 미래는 쿠바 민중의 손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동시에 쿠바의 민주화를 호소하는 것이기도 했다.

57년이 흐르고 나서야 미국은 그간의 적대정책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자인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서 쿠바 혁명 체제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쿠바 지도자들은 박수를 보냈고, 쿠바 국민들도 오바마에게 열광하는 ‘오바마니아’ 현상으로 화답했다.

오늘날 쿠바는 서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혁명 체제다. 소련과 동유럽을 비롯해 서양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은 몰락했다. 그러나 쿠바는 살아남았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신기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혁명의 성취를 지키면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쿠바 혁명 당시 체 게바라의 부관으로 아바나에 함께 입성했던 호르헤 파라는 2003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쿠바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우리가 꿈꾸던 나라를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우리가 실제 만들 수 있었던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1972년 미국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2000년 클린턴이 베트남을 방문했듯이 쿠바를 대했다면 상황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이제 미국의 적대정책이 사라지면 쿠바 지도자들은 더 이상 미국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과 대면해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 도입 이후에 갈수록 커지고 있는 소득 격차도 그중 하나이다. 냉전적 정치체제를 개혁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미국이나 유럽이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은 명확하다. 쿠바 혁명이 소련의 ‘붉은 군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탕수수 노동자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듯, 그 해법도 결국 쿠바 사람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 이번 호 기사로 쿠바 연재를 마칩니다.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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