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젊은 싱글’들로부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꼭 보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어젯밤에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간 내 주변의 ‘젊은 여자들’이 왜 여자 싱글이 주인공인 일본 인디 영화들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대략 감을 잡았다. 사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익〉은 초예민한 만화가가 쓴 시나리오라 하지만, ‘늙은 여자’인 내게는 그 감성이 꽤 부담스러운 데 반해, 세 명의 독신 여자가 차린 〈카모메 식당〉은 두어 번 더 보라고 해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였다.

〈조제…〉와 같은 영화는 많은 여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영화이고 이런 것들이 많으면 좋겠다. 장애인이지만 당당하고 똑똑하며 요리를 잘하는 소녀가 영리하고 착하고 감수성 좋은 남자의 지순한 돌봄을 통해 온전한 여자로 성장하는 것. 그리고 그 완숙해진 여자는 더 이상 그 남자를 곁에 둘 필요가 없다. 그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이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보았다는 후배는 이 영화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세상이 온 것이 반갑다. 그러면서 또 한편 어릴 때부터 남자에 매달리지 않도록 훈련된 나는 그들이 가진 판타지가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같은 여자이지만 세대에 따라 판타지가 다른 것이다. 우리 세대, 그러니까 50, 60대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이 예외였던 세대이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막막한 시대였으므로 대부분이 적령기에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 전문직 여성은 예외적인 사람이었고, 특히 남자 중심으로 짜인 세상의 규범에 거역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남자에 의해 휘둘려온 삶을 후회하는 자의식 강한 어머니의 무의식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에 더욱 몰두하고 남자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던 편이다.

가깝게는 나의 외할머니도 그런 경우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에게 “한 남자를 섬기지 말고 나라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고 하면서 의사가 될 것을 권했다. 나의 어머니의 꿈은 그래서 무의촌에 가서 독신 의사로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는 결혼을 하고 세 딸을 낳았으며, 딸들에게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 즐겁게 할 일을 갖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나는 결혼을 해서도 계속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에 결혼을 했다. 실제로 내 주변의 내 세대 여성 동료들은 ‘중성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우리들은 아예 남자에게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던 편이다.

그런데 경제·사회적 자립이 가능해진 지금 시대에, 자립한 여성들은 끝없이 연애를 꿈꾼다. 특히 요즘 잘나가는 ‘골드 미스’로 불리는 제자들은 서른이 넘어가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지려고 조급해하는 그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최근 조금씩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들은 우리처럼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세대가 아니라 텔레비전이 키운 세대라는 것, 그리고 경제·사회적 자립이 의미하는 바가 더 이상 ‘자아실현’이라든가 ‘사회적 공헌’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면서 말이다. 일 자체로 대단한 만족과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없는 ‘탈진보’의 시대, 평생직장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 고용’시대, 인간관계가 고도로 분절되어 모두가 아주 외롭고 불안한 시대 상황이 나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늘 부유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보니 변치 않는 지순한 사랑이나 절대적으로 합일하는 순간을 열망하고, 평생직장을 보장할 것 같은 결혼 제도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따로 또 같이’ 사는 주거 공동체를 꿈꾸며

엄밀하게 연애와 결혼이 경제·사회적 자립을 한 이들에게는 무엇일까? 일에 몰두하다가 혼기를 놓쳤다고 몹시 불안해하는 후배들에게 두 명의 친구를 소개해볼까 한다. 내 절친한 또래 친구는 주변 사람들이 ‘결혼 안 하냐’며 성가시게 굴 때마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고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마흔다섯 살에 결혼을 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 나이에 결혼을 했고 지금 기혼인 친구 중에 가장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대학생인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신의 생활비를 마련한다. 음악 일을 하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 작정을 일찍이 한 이 당찬 친구는 지금 네 명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중 둘은 남자이다. 밥은 밥 잘하는 사람이 하고, 반찬도 각자 잘하는 것들을 때에 따라 준비한다. 주말에는 다 함께 빨래하고 청소하고 시장 보고 외식을 한다. 그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나가고 들어올 때 서로 허그(hug·껴안기)를 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 생의 어느 시점보다 행복한 ‘동거 가족’ 생활을 하고 있다.

시대적 불안이 전염병처럼 번지면서 따뜻함과 여유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자녀 양육도 시장이 하고 결혼도 시장 바닥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종류의 돌봄과 배려가 상업화되는 가운데, 그간 가정에서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길러져온 신뢰와 사랑과 존경은 길러지지도 못하고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화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게 되고, 외롭고 불행해진다.

쉬운 답이 없는 시대다. 시대가 그러하니, 불안해도 허둥대지는 않았으면 한다. 조급하게 애인을 찾아 헤매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불안이 엄습해오면 〈조제…〉나 〈카모메 식당〉 같은 따뜻한 영화를 친구들과 함께 보면서 순간을 즐기는 거다. 애인이 없다는 타령만 하기보다 홀로 당당하게 서는 것, 그렇지만 관계에 대해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친구들을 많이 만들 수 있는 마을로 이사를 가든지, 맘 맞는 친구 간에 동거 가족을 만들어서 살다 보면 애인도 생기고 행복감도 들 것이다. 성급한 욕심이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사람들끼리, ‘따로 또 같이’ 사는 나름의 주거 공동체를 만들어 하루하루 즐겁게들 지내면 좋겠다.

기자명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문화인류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