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벌써 12년이 흘렀다. 한 문장이 나를 쳤다. 나는 그 문장을 놓치지 않았다.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다.’ 이 한 문장은 내게로 와서 일련의 연작시가 되었다. 1996년부터 쓰기 시작한 〈농업박물관 소식〉은 그렇게 태어났다.
두어 달 전,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의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지난해 5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권정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새로 편집한 것인데, 1996년 이후에 발표한 산문 몇 편에다 선생의 삶과 문학을 추모하는 글 두 편을 보탰다. 조금 두꺼워진 〈우리들의 하느님〉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선생의 산문집이 고맙고 미안했다.

모든 진정한 고마움에는 미안함이 들어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현실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는 생태론에 빠져들었다. 내 일상적 삶 안팎에서 산업 문명의 ‘마지막 징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몸은 아팠고,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했으며, 일상적 삶은 속도 지상주의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삶이, 세계가 감옥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들의 하느님〉을 만났다.
지난해 5월, 선생을 추모하는 여러 글에서도 드러났고, 얼마 전 1주기에 맞춰 나온 〈권정생의 삶과 문학〉(창비)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했듯이, 권정생을 아동문학가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그는 생명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이자 이야기꾼이었으며, 역사와 현실의 질곡에 대해 바른말을 아끼지 않은 양심 있는 지식인이었다. 〈우리들의 하느님〉을 성서에 비유하는 이들은 그를 주저없이 ‘성자’라고 부른다. 나처럼 생태론에 치우친 이들에게 권정생은 실천적 사상가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스콧 니어링 못지않은 이 땅의 자생적 생태주의자인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 앞에만 서면 나는 작아진다. 실천하지 못해 미안하기만 한 것이다.

고 권정생(위)은 ‘성자’이자 실천적 생태주의 사상가였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권정생의 성장기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으나, 집에는 입에 풀칠할 것이 없었다. 유랑 걸식을 하다가 병을 얻은 그는 교회 문간방에 깃들여 종지기로 일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30∼40년 전 시골 교회 풍경을 배경으로 지독한 물질주의에 빠진 한국 교회를 신랄하게 꾸짖는다. 이어 그의 시선은 근대화, 즉 개발·성장 지상주의의 그늘로 확대된다. 농촌과 농업, 농민이 붕괴해가는 과정을 한복판에서 지켜본 것이다.

권정생은 평생 안동 땅을 벗어나본 적이 없지만(평생 전신결핵과 투병해온 그의 체력이 다섯 평짜리 우거를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그는 전지구적 시력과 시야를 갖고 있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실린 산문들은 반전·평화 사상에 집중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약소국 처지에서 선진국의 반성을 촉구한다. ‘반생명적인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지극한 성찰.’ 이것이 〈우리들의 하느님〉에 나타난 권정생의 삶과 사상이다.

최근, 이 책이 ‘불온서적’ 리스트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고 두 번 웃었다. 한 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고, 두 번째는 정부 당국이 독서 캠페인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같아서 웃었다. 불온하다는 것은,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부정의 정신’의 다른 표현이다. 전복적 상상력과 동의어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불온서적’이 필요 없어도 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다. 지금·여기가 천국이면 된다. 내가 보기에, 지금·여기는 천국이 아니어서, 나는 〈우리들의 하느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어보라고 권한다.

기자명 이문재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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