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철이(24)가 집에 들어간 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지금 민철이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은 반 지하이다. 장남이 돌아왔다고 아버지는 부랴부랴 아들에게 ‘방’을 주고 싶어했다. 없는 돈에 구할 수 있는 집은 반 지하밖에 없었다. 민철이의 말을 빌리면 “환풍이 되지 않아 차를 끓일 때마다 주전자와 함께 집안 전체도 덩달아 펄펄 끓는” 집이다. 하루종일 먼지 구덩이에서 일을 한 뒤, 빛도 들어오지 않고 습기가 차 눅눅한 집에서 쪽잠을 자는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이다.

민철이네 가족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부도를 맞아 파산했다. 대기업의 설비 하청공사를 하는 중소기업 사장이던 아버지는 감옥에 갔다. 대신 어머니가 보험설계사 일을 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아버지는 출소한 다음 정육점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하는 족족 망했다.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로 수많은 직장인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들 모두가 경쟁자였다. 부모님은 자주 다투었고 결국 이혼을 했다.

ⓒ연합뉴스민철이네 집은 비록 반 지하이지만 가족끼리 서로 위로해가면서 산다.
부모님의 이혼과 동시에, 민철이는 과외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을 마련해 집을 나왔다. 그나마 민철이는 머리가 꽤 굵어지고 난 다음에 가족이 해체돼 하던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명문 대학에 입학해 독립을 하는 게 수월한 편이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부모님이 별거하던 중에 동생은 ‘조직’에 가담했다.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을 보면서 동생은 ‘인생은 한 방’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가끔 동생이 칼침을 맞고 돌아와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하는 걸 볼 때마다 민철이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집에 돌아온 뒤 얼마간은 아버지의 자책과 새어머니의 좌불안석, 할머니의 신세 한탄 속에서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지만, 민철이는 ‘모두가 불쌍해져버린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자기가 뭔가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될 수 있는 한 일찍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과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아들의 노력에 부모님은 고마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미안해했다. 어느 날 민철이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니야. 이 모든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야. 우리 중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이 말이 기적을 낳았다. 집을 겉도는 자식과 조폭이 된 자식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기 탓만 하던 부모에게 민철이의 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이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야.” 아버지는 다시 한번 당신이 힘을 써보겠다고 결심했고, 새어머니는 고마움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다가 끝내 울었다.

세상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산다.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은 짐이 되었으며,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와 지역사회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글이 돼버렸다. 이런 세상에서 민철이가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위로하는 법과 위로의 힘을 배운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따라 세상이 실제로 변하는 큰 경험이었다.

민철이는 그 위로의 힘을 좀더 밀고 나가보려 한다. 지금도 성매매 피해 여성의 공동체인 W-ing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자원봉사를 나가고 초록정치모임, 비정규직 노동운동단체 등 몇몇 단체에도 기웃거린다. “학자금 대출 빚이 2000만원인데 그걸 생각하면 버젓한 직장에 취직해 돈 버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 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한다. “내 존재가 확장되고 자유를 끝까지 밀고 가보는 쾌감의 흥분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란다. 그가 그 자유와 쾌감을 더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명 엄기호 (‘팍스로마나’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동아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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