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오전 10시,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10반(명예 3학년10반) 박정슬 학생의 외할머니 전미순씨(63)는 손녀의 책상 위를 정리했다. 책상 위를 덮었던 포스트잇과 편지, 방명록, 노란 리본을 에어캡으로 감싸 갈색 상자에 넣었다. 책상 크기만 한 상자는 외부 열기나 습도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성지로 제작되었다. 모두 안산교육지원청으로 임시 이전된다. 이름이 쓰인 상자 위에는 하얀 국화꽃 한 송이가 올려졌다.

8월1일 경기교육청과 단원고, 4·16가족협의회는 13차례 협의한 끝에 희생 학생들이 썼던 단원고 기억교실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하는 데 합의했다. 기억교실이 최종 안치될 공간은 단원고 앞에 건립될 ‘4·16민주시민교육원(가칭)’으로, 아직 구체적 규모나 착공일 등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

유가족은 다가오는 2학기에 재학생이 기억교실에서 수업할 수 있도록 8월11일부터 반별로 책상 위의 유품을 정리했다. 8월18일까지 책걸상과 교탁, 칠판 포장을 완료했다. 8월19일 밤 단원고 운동장에서 이송식 ‘기억과 약속의 밤’을 치르고, 다음날부터 이틀간 이송한다. 책걸상과 칠판 등의 비품은 여름방학 때,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창문과 창틀·난간 등은 겨울방학 때 옮긴다. 기억교실 내부와 2·3층 복도 곳곳에는 번호가 매겨진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옮긴 물건을 다시 배치할 때 위치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표시였다.

ⓒ시사IN 신선영희생자 유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며 서로 위로하고 있다.

2학년 교무실은 정리가 빨랐다. 오른쪽 벽면에 걸린 커다란 화이트보드에는 아직 ‘4월 중 행사’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주부터 자기주도 학습을 감독할 교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희생된 교사의 자리 위에도 상자와 국화꽃이 놓였다.

오후 3시, 희생자가 가장 많은 2학년7반 교실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이 모였다. 전체 33명 중 32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반갑게 포옹한 인사는 곧 서로의 목을 끌어안은 채 흐느낌으로 변했다. 유가족은 각자 자녀의 자리에 앉았다. 담임 이지혜 교사의 아버지 이종락씨(62)도 교탁 옆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함께 모여 아이들의 자리에 앉아보자고 제안한 오영석 학생의 아버지 오병환씨(44)가 교탁 앞에 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쫓겨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양보하는 이유는, 이 학교를 다니는 재학생들, 우리 학생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창가 쪽부터 차례로 복도에 있는 상자를 들여와 책상 위를 정리했다. 도중에 울음이 오열로 바뀌어 옆자리에 앉은 유가족이 대신 마무리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지혜 교사의 아버지도 교탁 위를 정리하고, 서랍을 열어 남아 있던 분필을 상자에 담았다. 이지혜 교사는 기간제 신분이라는 이유로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2학년7반입니다”

이정인 학생의 아버지 이우근씨(46)는 세월호 인양 작업을 감시하기 위해 사흘 전 동거차도에 들어갔다. 이씨는 대신 세월호 참사로 인연을 맺은 안은초씨(22)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씨는 분향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대학생 안씨와 가족처럼 지냈다. 딸과 무척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녀의 목에는 이씨가 내준 정인이의 학생증이 걸려 있었다.

유품 정리가 끝난 뒤 유가족은 교정으로 나가 초록 잎이 무성한 벚나무 아래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아이들이 찍었던 사진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다시 돌아온 교실에서 ‘마지막 종례’가 끝났다. 오영석 학생의 아버지 오병환씨는 “집에서 아파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세요. 이제 우리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2학년7반입니다. 죽을 때까지 동창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나경희 〈시사IN〉 교육생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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