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반, 명나라의 통치 아래 잠잠해 보였던 만주 지역에는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해. 무능하기로 유명한 황제들이 연속해서 등장하고 임진왜란 등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200년을 이어온 명나라 왕조는 속 빈 강정이 되었지. 그 틈을 타서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만주족들이 힘을 키웠어. 만주족의 지도자인 누르하치는 나라를 세워 명나라 영토였던 요동을 비롯해 만주 지역을 석권해갔다. 1621년, 요동의 중심지인 심양이 함락되고, 그곳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져버렸어. 그 가운데 모문룡(毛文龍)이라는 장군이 있었지.

모문룡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다. 조선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어. 2년 전인 1619년, 당시 임금이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에 못 이겨 지원군을 파견했지만, 도원수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밀명을 내린 바 있었다. 난데없이 굴러든 모문룡이라는 불청객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을 거야. 날로 강성해지던 만주족의 나라 후금(後金)은 모문룡에게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를 잡기 위해 조선 땅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어. 골치가 아파진 광해군은 평안감사 박엽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 무리들 데리고 어디 섬에라도 들어가라고 하라.” 그래서 모문룡이 들어간 곳이 가도(椵島)라는 섬이었어. 모문룡은 이 섬을 요새 삼아 눌러앉게 돼.

ⓒ시사IN 신선영 2월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사드 배치 반대 집회. 사드는 미국 방위 전략의 일환이다.

후금으로서는 모문룡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어. 가뜩이나 배 타는 재주가 없는 만주족들인데, 모문룡 무리는 섬에 틀어박혀 요동을 노려보다가 여차하면 말썽을 부려댔으니 그야말로 손톱 밑 가시였지. 피난처를 제공한 조선에 대해서도 눈을 흘길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제의(‘함께 후금을 치자’)에 따르자는 신하들에게 맞서 명철한 현실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군대를 크게 일으키든 적게 일으키든 후금의 원망을 돋우고 화를 불러들이기는 마찬가지다. (…) 지금 산해관 밖의 지역이 이미 오랑캐(후금)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비록 백만의 정예병을 일으키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금 바로 옆에서는, 사관(史官)이 다음과 같이 붓을 놀리고 있었어. “장군 모문룡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가지고 적에게 대항하고 병력과 군량을 요청하는 것도, 적들이 서쪽으로 침범하려는 계책을 늦추고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 어떻게 임금이 ‘힘을 헤아린 뒤에 나아가고, 승리할 수 있게 된 뒤에 싸워야지, 경거망동해서 적들의 원망을 돋워 화를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관은, 모문룡이 조선을 지키기 위해 후금과 맞서고 있으니 그를 도와서 후금을 쳐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은 결국 쫓겨나고 만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왕위에 오른 뒤 모문룡에게 보내는 사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문답할 때 말을 잘하여, 모문룡에게 마음을 같이하여 협력하겠다는 뜻을 자세히 일러줘야 한다.” 다음은 사신의 답변. “이전에야 (광해군이) 매사에 반대해서 (모문룡이) 화를 냈지만 요즘에야 하고 싶은 걸 다 허락한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모문룡의 시건방은 하늘을 찌른다.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이런저런 지원을 요구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행패도 서슴지 않았어. 후금도, 모문룡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조선을 곱게 볼 수 없었겠지. 조선 조정은 후금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 작전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장수가 우리나라 국경에 와서 주둔하는 것이나 요동 백성이 국경을 넘어와 중국 장수에게 귀순하는 것은 모두 우리나라가 시킨 것이 아니니 꼬투리 잡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네가 후금의 왕이라면 어떻게 생각했겠니. 모문룡이 조선 땅에 근거지를 마련해서 군대를 기르고 무역도 하는 등 하고픈 대로 살아가는 게 명백히 드러나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정작 조선 측은 ‘우리가 시킨 게 아니에요. 트집 잡지 마세요’라며 손을 내젓고 있어. 후금 조정에서는 “조선 놈들은 우리를 장님으로 아나? 아니면 바보로 아나?” 이러면서 가래침을 찍 뱉지 않았을까. 국제 정세의 변화보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의리’에 기울어버린 조선은 후금의 주먹을 부르쥐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인조 때 정묘호란이 터졌다. 위는 인조가 안장된 파주 장릉.

마치 모문룡의 뒤치다꺼리를 했던 것처럼

마침내 정묘호란이 터진다. 후금은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중 두 개가 모문룡과 관련된 것이었어. “(조선은) 모문룡을 숨기고 도와주는 일을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대 나라에 글을 보내 모문룡을 묶어와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자고 하였으나 그대가 또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모문룡을 그대 나라에 데려다 두고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들을 불러들이고 우리 변경을 공격했다.”

모문룡은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사실은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일 뿐이었다. 가도에 틀어박혀 조선과 명나라 양쪽에게 사기 치고 ‘삥 뜯던’ 양태를 보면 불한당과 다름없었어. 후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러나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서해의 섬 가도에 명나라 사람들 수만명이 득시글거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후금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문룡을 잡으러 온 것인가?” 조선도 모문룡에 대한 후금의 경계심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조선은 모문룡에게 간 쓸개 다 내놓고 질질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르다가, 이로 인해 더 힘센 후금에게 짓밟히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거야.

입으로만 요동 수복을 부르짖는 모문룡에게 전략적 거점과 막대한 물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고 있다”라고 야무지게 착각했던 조선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외침을 연이어 감당해야 했다.

아빠는 최근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사드(THAAD)’ 문제를 보면서, 400여 년 전인 1621년 별안간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떠올린다. 혹시 오해하지 마라. 아빠는 명나라를 미국에 비교할 생각이 없고, 청나라가 오늘날의 중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흥성할지 모르는 것처럼, 조선 사람들도 명나라와 후금 가운데 어느 쪽이 승리할지 헷갈렸을 거야. 단, 모문룡 같은 이에게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주신 은혜’를 들먹이고, 없는 살림 쥐어짜 바치면서도 “그는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라고 ‘정신승리’에 젖었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어떤 횡액을 겪었는지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드는 한국을 방어하기보다 미국 영토로 향하는 북한 미사일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미국 방위 전략의 일환이야.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마음먹으면 핵미사일이 아니라 사정거리가 300㎞에 달한다는 방사포를 수도권에 쏟아부으면 그만이거든.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고…. 그런데 아직 성능조차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북한 미사일을 막겠다고, 중국과 러시아가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는 사드를,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 땅에 설치하려는 중이다. 그러면서 ‘사드는 우리를 위한 겁니다!’라고 애써 강변하고, 중국에겐 ‘여러분을 겨냥한 게 아니에요’라면서 어설픈 제스처를 취한다.

어쩌면 우리는 또 하나의 가도(椵島), 즉 모문룡이 웅거했던 가도를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중국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어투로 우리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한 번쯤 곰곰이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과연 지금 우리는 지혜로운가?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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