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and Chill?(넷플릭스 보면서 놀래?)”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한국에서는 ‘라면 먹고 갈래?’와 유사한 뜻을 지닌 이 용어는 미국에서 넷플릭스의 파급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올해 초 한국에 상륙한 넷플릭스는 ‘현지화’ 과정을 혹독히 겪고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가위질(이라 적고 ‘삽질’이라 읽는다)’ 때문이다.

해지할 때 하더라도, 이미 넷플릭스를 접했다면 이것만은 꼭 보고 떠날 일이다. 〈매트릭스〉의 감독으로 유명한 워쇼스키 남매(이제는 자매)가 제작하고, 배두나가 출연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센스 에이트(Sense 8)〉.

〈센스 에이트〉를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충분히 이해한다. 에피소드 1에서부터 4까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어쩌면 12편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8명이다 보니 각기 정체성을 풀어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도 〈센스 에이트〉에는 드라마 처음부터 엔딩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장치’들이 있다.

〈센스 에이트〉의 주인공은 8명이다. 세계에 다양하게 흩어져 사는 이들이 알고 보면 하나의 ‘감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미래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이를 두 번째 탄생이라고 한다), 사회는 이들을 ‘센세이트’라고 한다. 여기서 미래적 능력은 서로 ‘공감’하고 순간적으로 ‘공존’ 가능하며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센세이트는 8명씩 하나의 세대를 이룬다. 같은 세대의 센세이트는 동시에 태어난 동기이다. 그들은 어릴 때 센세이트의 잠재성만을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 번째 탄생이 이루어지면서 서로 공감·공존·연결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이 공감이나 공존, 연결은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도 그럴 것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Netflix넷플릭스 드라마 <센스 에이트>(위)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주인공 8명이 텔레파시로 연결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 이 8명은 서로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환영처럼 자신들이 연결되는 걸 느끼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박선(배두나)이 서울의 청계천 거리를 걷고 있다가 매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중 케냐에 살고 있는 센세이트(반담)와 연결되는 순간은 특정한 조건이나 반응이 아니라, 박선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다. 그 무의식중의 ‘누군가’는 반담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며, 센세이트 중 그 감각을 공유하는 동기가 초대되었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기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공통의 언어로 알아들으며, 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센세이트들이 소환된다.

몸을 공유할 수 있는 ‘센세이트’의 능력

청계천을 걷는 동안 박선은 사람들 눈에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센세이트들은 서로 연결된 센세이트 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선이 반담을 초대하면, 박선 옆에는 반담이 존재하거나 박선 안으로 들어가 몸을 ‘공유’할 수 있는데, 그 순간에도 케냐에는 신체적 ‘반담’이 존재한다. 이들끼리의 공존·연결·공감은 영혼의 교환이나 만남에 가깝지만 서로 닿을 때 물질적으로 닿는 것 같은 촉감을 센세이트 사이에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환상이나 영혼의 교환은 아니다. 그들은 가끔 센세이트 사이에서 타자와 자아의 무너짐을 느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이러한 능력에 익숙해져, 한 공간에 8명이 전부 초대되거나 몸의 공유가 번갈아가며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센세이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가 실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센세이트들 중 윌-라일리, 볼프강-카라가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례다. 이들이 센세이트끼리 사랑에 빠질 경우 ‘극한 나르시시즘’을 경험하게 되는데, 서로가 교감하며 같은 공간 내에서 몸을 공유할 수 있는 건 결국 자-타가 무너지는 경계를 극한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관계에서 나와 상대를 구분할 수 없는 경계까지 오게 되면, 그것이 극한 나르시시즘으로 연결되어 관계의 분리가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감각의 공유, 신체의 공유, 기억의 공유 같은 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상향이 아닐까. ‘왜 넌 나를 이해할 수 없니, 너는 왜 날 인정하지 못하니?’ 같은 갈등은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친구,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맺는 다양한 관계에서의 결핍을 야기한다. 실제로 우리가 SNS에서 접하는 ‘좋아요’ 버튼과 게시물의 ‘공유’는 이러한 결핍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려는 하나의 장치다. 센세이트들은 이런 결핍을 서로서로 채워주며 극한 이해와 공감을 부르는 존재들이다. ‘너는 곧 나’가 이루어지는 세계, 내가 느끼는 즐거움·애정·슬픔·분노를 교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존재는, 아마도 개별적인 감각이 넘쳐나지만 ‘내’ 마음을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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