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사도 돼요.”

다정한 눈매의 예술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구경을 했으면 뭐라도 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부스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던 내게 한 말이다. 내 작품이 당장 갖고 싶을 만큼 맘에 드는 게 아니라면 굳이 살 필요 없다는 그 말에 이곳은 ‘판매의 기술’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구나, 깨달음이 퍼뜩 들었다.

올해로 15년차를 맞은 ‘홍대 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이하 ‘홍대 프리마켓’)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플리마켓(벼룩시장)의 시초 격이다. 영국에는 런던의 스피탈필즈마켓, 일본에는 도쿄 세타가야 구와 교토 등의 아트프리마켓 등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럽과 일본에서 플리마켓은 골동품·중고품을 거래하는 벼룩시장이 일반적이다. 한데 유독 한국의 경우 창작물을 거래하는 예술시장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홍대 프리마켓’ 외에도 서울 세종예술시장 소소, 대구 예술창작 플리마켓 등 정기적으로 열리는 유명 플리마켓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맘 카페’를 중심으로 지역별로 열리는 플리마켓에서도 중고 물품보다는 직접 만든 아기 옷이며 신발, 수제 청 등 창작·공예품을 파는 것이 주가 된다.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예술가들을 위한 장소가 워낙 부족한 한국 현실에서 그 나름의 자구책이 아니었나 싶다. 스스로 만든 물건을 내어놓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을 만나기 위한 장소, 혹여 그 물건을 팔지 못하더라도 감상을 나누는 것 자체로 즐거워지는 장소, 한국의 플리마켓은 그런 공간이고, 홍대 프리마켓은 그 원류다.

ⓒ강혜경 제공
ⓒ강혜경 제공
ⓒ강혜경 제공최근에 찾은 ‘홍대 프리마켓’에는 실용성에 독특함을 더한 생활용품류가 많아졌다. 올해로 15년차를 맞았다.

 

긴 시간 한 장소를 지키다 보면 그 자체가 역사가 된다. 달라져 있기도 하고, 여전하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홍대 프리마켓은 특이함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밀리터리 무늬 프릴을 단 반짝이 스판 치마며 화려한 날염이 들어간 두건 등 “이걸 도대체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 거지?” 싶은 의류와 액세서리부터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던 북아트 작품과 볼트·너트를 쌓아 만든 금속공예 작품 등, 다소 마감이 거칠지만 자신만의 색깔이 강한 작품이 가득했다. 이곳을 찾는 이 역시 남다른 문화를 즐기려는 청년이 많았다.

최근에 찾은 홍대 프리마켓의 인상은 동글동글하다. 특이한 작품보다는 실용성에 독특함을 더한 생활용품류가 많아졌다. 당장 내 것과 바꿔 들 수 있는 지갑이며, 차분한 날염이 들어간 에코백, 책갈피로 쓰기 좋은 고양이 일러스트, 깔끔한 은제 실반지 등이 그렇다. 방문객도 한국을 경험하고자 하는 외국인 관광객, 부모와 함께 찾은 어린이 등 훨씬 폭이 넓어졌다. 현금이 아니면 살 수 없어서 동동거리며 근처 편의점 현금 입출금기로 뛰어다녀야 했는데, 일부 참가자의 경우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휴대 단말기로 카드 결제까지 가능하다.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생활 창작 워크숍

그 외에도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몇 가지 추가됐다. 시장이 열리는 공원 한편에 별도 부스를 열고 ‘사회적 연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도시 내 여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 혹은 단체들이 자유롭게 제안과 캠페인, 홍보 활동을 하는 장소를 제공해 참가자 및 방문객이 공익 활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2015년에는 약 12개 팀이 참가하여 인권 인식 개선, 제3세계 아이들의 예술 활동을 돕는 기부, 아프리칸 예술가 작품 홍보 등이 진행됐고, 지난 4월23일에는 장애인 인식 개선 캠페인이 있었다. 그 외에도 홍대 프리마켓과 연계된 창작 공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프리마켓 투어, 방문객과 함께 작업 과정을 공유하고 직접 창작에 참여해볼 수 있는 생활 창작 워크숍 등도 가능하다(문의:www.freemar ket.or.kr).

여전한 것은 이곳의 존재 목적이자 동력인 참가자다. 홍대 프리마켓은 여느 플리마켓과는 달리 ‘셀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인 셀러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의 시장에 참여하며 자신의 창작품을 매개로 주변 창작자 및 방문객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참가자’라 부른다. 그 말처럼 자신이 만든 물건에 자부심을 갖는 이들은 만드는 과정에서 들인 시간을 방문객과 공유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어떤 생각으로 구상했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남다른 재료를 고르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 만들었는지 즐겁게 이야기해준다. 그 뿌듯함이 주는 에너지와 독특한 감성이 실은 이곳의 주력 상품이자, 그렇게 만든 작품에 대한 즐거운 감상과 의견이 방문객의 주요 지불 수단이 아닌가 싶다. “I made it.” 참가자의 말을 들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꼭 먼 곳에서 찾을 일은 아니다. 약간만 검색하면 이번 주말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을 확인할 수 있다. 창작자의 감성이 오롯이 담긴 세상 단 하나뿐인 물건을 통해 일상의 새로운 힘을 얻고 싶다면 플리마켓이 열리는 장소도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소풍처럼 플리마켓 가볼까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는 검색 탭 중에 하나로 ‘플리마켓’이 추가돼 있다. 플리마켓만으로도 콘텐츠를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전국에서 주말마다 플리마켓이 열린다는 얘기다. 그중 지역에서는 유명하지만 다른 데서는 조금 덜 알려진 플리마켓 세 군데를 소개한다.

서울 SAF 아트플리마켓
시간:매주 화요일 오전 11시~오후 3시
장소:서울 광화문 서울예술재단 마당
상품:천연염색 스카프, 일러스트, 도예, 스테인드글라스 공예품, 향초 등
특징:이름만큼 예술성 높은 상품들을 내놓는 참가자들이 모이는 곳. 독특하게 평일 낮에 진행돼,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활용해 많이 찾는다. 근처 서울역사박물관, 성곡미술관 나들이를 겸해 들르면 더욱 좋다.

ⓒ어썸데이즈블로그

대구 삼덕사잇길 플리마켓
시간:매주 토요일 오후 4~8시
장소:대구 로데오거리에 위치한 삼덕사잇길(사진)
상품:천연 비누, 레진 액세서리, 의류 및 소품, 제과 등 다양한 핸드메이드 제품류
특징:이미 소문을 통해 대구 및 주변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어 타 지역 참가자들이 원정을 오기도 한다. 좁은 골목이 주는 특별한 느낌과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진 작품들이 잘 어우러진다.

경주 비클래시 플리마켓
시간: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3시
장소:경북 경주 봉황대 소무대 앞
상품:유아용 의류 및 소품, 이유식, 수제 잼과 수제 청, 애견용품, 바스킷 백, 화분 등
특징:지역 육아 카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플리마켓으로 젊은 엄마들이 직접 만든 육아 관련 상품이 많긴 하나, 상품 분야가 겹치지 않도록 참가자를 구성해 구경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근처 풀밭에서 여유롭게 소풍을 즐기기에도 좋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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