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부근에서 게스트하우스(니어리스트)를 운영한 지 3년째다. 게스트하우스는 작은 지구다. 피부도, 말도, 나이도 다른 다양한 게스트들이 와서 서로 외면하지 않고 침대 하나씩 빌려 도미토리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걸 보면 이게 세상이구나,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간 느낀 바를 두서없이 적어본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음양을 터득하다

여성은 계획을 세우고 또 세우고 변경하고 가다듬는다. 한두 달 전에 예약했다 입실 며칠 전에 일정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이에 비해 아무 생각이 없다. 성수기 방이 꽉 찼을 때 땀 흘리며 무거운 짐을 메고 예약도 없이 불쑥 들어와 맡겨놓은 것 달라는 투로 “방 없어요?” 묻는다. “없어요” 하면, “알았어요” 하고는 두말없이 나가 찜질방으로 직행한다.

여성은 양파처럼 겹겹이다. 퇴실 후 여성실엔 일반적으로 남성실보다 남긴 것, 떨어뜨린 것이 많아 개업 초 ‘여성이 깨끗하다’고만 믿던 나를 당황케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선 그날 만난 생면부지 젊은이들끼리 밤늦게 술파티를 벌이기도 하는데, 여성은 남성과 같이 있을 때보다 동성끼리만 있을 때 훨씬 더 크게 깔깔거리고 술도 엄청 많이 마신다. 남성은 남들 다 가는 주말에 여행을 떠나지만 여성은 싸고 한적한 주초를 선호한다. 그래서 월요일엔 여성 게스트가 남성보다 많다. 난 딸을 키웠지만 그저 건성이었을 뿐 여성 ‘화장발’이 변장 수준인 줄은 몰랐다. 낮에 입실할 때와 저녁 취침 무렵, 다음 날 얼굴 가다듬고 퇴실할 때 매번 달라서 같은 이에게 “누구…” 하고 실수한 적도 있다. 이런 작은 것도 모르고 60년을 지낸 나는 그동안 인간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나 속으로 웃는다(이상 남녀 차에 관한 인상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임).

ⓒ시사IN 신선영

내 친구는 어디까지인가

군대건 회사건 대한민국 사회는 보통 수직 구조다. 지시·이행의 계서적 관계에서 나도 수십 년을 살았다. 이에 비해 게스트하우스는 수평사회, 열린사회다. 입실하는 게스트의 연령·국적은 제각각이지만 ‘여행’ 하나로 그들은 오픈된다. 여행객, 나그네 호칭 하나로 그들은 수평이다. 호스트(=‘쥔장’)인 나도 수십 년 아래 젊은이들과 점점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처음엔 날 부르는 게스트들의 ‘아저씨’ 호칭이 어색했으나 요샌 속으로 ‘할아버지라고만 하지 말아다오’ 주문한다.

게스트하우스에는 도미토리, 화장실, 부엌 등 공용 공간이 많다 보니 지킬 것도 많다. 그래서 주인 잔소리도 많아지는데 언젠가 한 게스트가 체크아웃 후 남긴 메모를 보고 움찔했다. “He is just an old poser(그는 나이 든 ‘잘난 척’일 뿐이야)”. 아뿔싸, 내가 수평사회 룰을 어겼구나. 이후엔 잔소리가 아니라 서로에게 편한 정보를 주는 식으로 대화한다. 게스트 서로에게, 주인과 객에게, 게스트하우스에선 모두가 친구이며 선생이 된다.

ⓒ연합뉴스

작은 지구가 바로 여기

세계 여행 챔피언은 단연 독일 사람들이다. 1년 중 해외여행 일수가 가장 많은 나라답게 독일인들은 여행 베테랑이다. 눈동자가 차분하고 공부를 많이 해온 듯 핵심만 물어본다. ‘한옥마을에서 뭘 봐야 하나’ 따위 두루뭉술한 질문을 하는 이는 독일인이 아니라고 봐도 좋다. 그들은 ‘콩나물국밥집 중 삼백집과 왱이집 맛 차이가 뭐냐’, ‘마이산을 가려는데 북부주차장과 남부주차장 어디가 좋냐’는 식으로 꼬치꼬치 묻는다.

독일인은 거의 후기를 남긴다.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평가나 정보를 다른 여행객과 공유하는 걸 의무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 후기도 보안 몇 점, 위치 몇 점, 서비스 몇 점, 청결도 몇 점 하는 식으로 꼼꼼히 나눠 쓴다. 이에 비해 프랑스인들은 후기가 없거나 있어도 대개 후하다. 세목별로 나누기보다 분위기, 주인과의 교감에 평가가 좌우되는 듯하다. 빈티지 좋은 보르도 와인 빈 병을 라운지에 두면 프랑스 게스트에게 효과가 좋다. 그들은 대개 목소리가 잔잔하고 우울한 듯, 몽상하듯 말한다.

영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음식에 욕심이 없다. 아침 메뉴로 제법 풍성하게 이것저것 차려내도 시리얼과 우유로 간단히 때우는 이가 많다. 유쾌하고 잘생기기론 역시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들은 눈을 똑바로 보며 새처럼 지저귄다. 이탈리아 남성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주의해야 한다. 자칫 게스트 중 누가 그 여자친구에게 호감 있다는 오해라도 줄라치면 게스트하우스가 부서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젊은이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이탈리아인 게스트다.

누가 누가 더 잘 노나

밤새 라운지를 시끄럽게 하기론 한국 사람 따를 이가 없다. 지난날 부여·옥저 시대부터 가무·음주를 즐겼다는 민족답게 한국 젊은이들이 일단 자기소개 후 음주 게임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박수·함성이 이어져 주인 화를 돋우고서야 그치기 일쑤다. 음주 게임은 일종의 권주가다. 낯선 분위기를 술과 함께 순식간에 기화시키는데 그 종류만도 수십 가지다. 이걸 번갈아가며 몇 시간씩 발산하는 건 한국인과 이탈리아인뿐이다. 다른 외국인들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혀를 내두르지만 이탈리아 게스트는 조금만 배우면 곧 게임을 이끈다.

중국인들은 정말 실용적이다. 택시 운전사에게 택시비가 많이 나온 거 아니냐고 ‘고소하겠다’고 중국말로 소리 지를 정도로 에너제틱하고 개중 어떤 이는 미니 밥솥을 지참해 게스트하우스 내에서 밥까지 짓는다. 옷차림도 평범하고 표정도 꾸미지 않으나 우리와 정서가 통하고 사람들도 ‘진국’이어서 난 중국 게스트들을 좋아한다(이상 나라별 특질 역시 개인 인상에 불과함).

여정은 길고 배낭은 간소했던 그들

게스트하우스는 젊은 곳이지만 그간 가장 잊지 못할 게스트는 오히려 노인이다. 각각 다른 시기에 온 남성 홀로 여행자 세 명. 70대 초·중반의 스페인인과 미국인 게스트, 80대 초반 오스트레일리아인 게스트. 이들은 몇 년째 세계를 돌고 있었다. 집이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생각날 땐 1년에 한두 차례 모국에 들러 가족을 만나면 그뿐, 또 짐을 꾸려서 떠난다고 한다. 집 팔아 떠난 길, 언제 끝낼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저렴한 숙소를 이용하는 듯했다. 길 흐르고, 시간 흐르고, 인생도 흐른다. 여정이 길고 그들 배낭은 간소했다. 저런 노년도 있구나. 내 친구들은 크루즈 탄다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게스트하우스 인생 여행이 있다는 걸 난 그들에게서 배웠다. 언제까지 주저하고 머뭇거릴 것인가. ●

기자명 임용진 (자칭 ‘게스트하우스 업자’·전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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