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장발장은 마들렌 아저씨로 신분을 숨기고 작은 도시의 시장으로 일하고 있다가 팡틴을 만난다. 딸 코제트를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지만 오히려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져 공장에서 해고되고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던 팡틴은 취객과의 시비 끝에 경찰관 자베르에게 체포당한단다. 이때 거리에서 전말을 지켜봤던 장발장, 마들렌 시장이 나서지. “이 여자를 석방하시오. 체포돼야 할 사람은 남자 쪽이오.” 그러자 자베르는 시장에게 반발하며 이렇게 얘기해. “제가 사건 현장에 있었습니다. 시민에게 달려든 건 저 여자입니다. 피해 시민 바마타부아 씨는 선거권이 있는 사람이며 광장의 모서리에 있는 4층 석조건물, 아름다운 건물의 소유자입니다.”

자베르의 말 중 ‘선거권이 있는’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프랑스에서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성인 남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단다. 여자? 여자는 한 100년 더 기다려야 했지. 2월 혁명 이후 투표권이 부여된 유권자는 800만명에 달했지만 그 이전(장발장이 시장이던 때를 포함해서)의 투표권자는 겨우 25만명 정도였다고 해. 즉 ‘아름다운 건물’ 정도는 소유하고 세금도 넉넉히 내는 사람만이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거야.

프랑스뿐 아니라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회 제도가 일찍부터 발달하긴 했지만 그 구성원을 채우는 투표권은 철저히 소수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어.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였던 영국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이자 의회군(軍) 장군이었던 아이어턴은 이런 말을 해. “아무 재산도 없는 사람들은 이 나라와 안정적인 이해관계가 없다. 그들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웃기는 얘기다.” 투표권을 확대해달라는 ‘재산 없는 사람들’의 외침은 끊임없이 지속됐지만 투표권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국한시키려는 이들의 방해와 탄압도 악착같았지. 1819년 8월16일,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팀의 연고지 맨체스터에서는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어.

ⓒ위키백과1819년 8월 영국군은 투표권을 요구하는 군중을 유혈 진압했다. 위는 ‘피털루 학살’을 묘사한 그림.

마침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의 몰락까지 지속된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다. 제대한 군인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왔지만 일자리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당연히 임금 수준도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지. ‘이렇게는 살 수 없다’며 절망한 사람들의 눈엔 독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 보유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해외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고 있었어. 곡물이 수입되지 않아야 그 가격이 유지되고, 토지 보유자들은 땅에서 나온 곡물을 팔아 수익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맨체스터의 성베드로 광장, 영어로 피터 광장에는 군중 수만명이 집결했다. ‘우리에게도 투표권을 달라. 우리 처지를 대변할 사람을 의회에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뜨겁게 타올랐어. 그러나 이 같은 요구는 당시의 정부나 투표권을 가진 유력자들에게는 더없이 무엄하고 무례한 반항이었지. 그들은 반항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집회 외곽에서 군중을 지켜보던 영국군 제15 검기병대, 그리고 지주와 귀족 등에게 고용된 용병들이 칼을 빼들고 무방비 상태의 군중을 향해 돌격했어. 양떼 속에 늑대가 뛰어든 것 같은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비극적인 사실은, 칼을 휘두르는 말 위의 기병들은 물론이고 그 칼에 맞고 쓰러지는 시민 가운데도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한 제대 군인은 칼을 맞고 죽어가면서 이렇게 절규했단다. “워털루에서는 남자 대 남자로 싸웠지만 이건 학살이야.”

500명 이상 칼을 맞은 피털루 학살

정부는 11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칼을 맞은 사람은 500명을 웃돌았다. 그 후 이 사건은 ‘성피터(베드로) 광장’과 ‘워털루’의 합성어로 ‘피털루 학살’이라 불려. 워털루 용사들이 피터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벌인 학살이라 비꼬는 이름이야. 이렇듯 세계사의 대부분에 걸쳐 투표권이란 여차하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위험한 권리였어.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좀 더 많은 자유가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투표권 역시 느릿느릿, 그러나 눈에 보이게 확대돼왔어.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면 ‘성인 남성’에 대한 투표권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됐지만 이 또한 절반의 성취에 불과했지. 한동안 세계의 절반인 여성들에게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투표권과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았어. 상류층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피땀을 흘려가며 투표권을 획득한 남성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도 ‘내 아내가 투표권을 가지는 건 말도 안 돼’라고 우기곤 했지.

ⓒ위키백과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다 1913년 목숨을 잃은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여성들의 참정권 관련 법안이 연이어 제출되었다. 하지만 의회는 어김없이 부결해버려. 여성들에게는 ‘이것 먹고 떨어져라’는 식으로 지방의회 선거권만 허용됐지. 아마도 당시 영국 남성들은 이렇게 말했을 거야. “여자들은 이 나라와 안정적인 관계가 없다고. 부엌일이나 하지 왜 나랏일에까지 참견하려는 거야.”

그러나 투표권을 달라고 절규했던 남자들처럼, 한편으로는 그 기억을 까맣게 잊고 ‘여자가 어딜?’이라는 소리나 내뱉게 된 남자들에 대항해서, 여성들은 눈물겨운 참정권 쟁취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우리가 나라를 세운 것은 우리 중 절반에게만 자유를 주거나, 우리 자손들 중 절반에게만 자유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즉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미국 여성 수전 앤서니)”라는 선언과 함께…. 지체 높은 귀족 여성들도 노동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거리에 나섰고, 심지어 버킹엄 궁전 난간에 몸을 묶고 매달리면서 필사적인 저항운동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에밀리 데이비슨이란 여성운동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 엡섬에서는 1780년 이래 ‘더비’라는 유서 깊은 경마 대회가 열려왔어. 1913년 6월4일 ‘더비’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한 여성이 갑자기 트랙으로 뛰어들었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엘리트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이었어. 그녀는 트랙으로 뛰어들기 전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는 구호를 되뇌고, 옷 속에도 여성 투표권 운동 단체의 깃발을 품고 있었다고 해. 그녀가 국왕 조지 5세 소유의 말고삐를 잡아채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인지, 단순히 경마를 방해하려 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슨은 집으로 돌아갈 기차표를 지닌 채 말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말았지. 이 사고가 발생한 뒤 유력 신문 〈타임스〉는 “한 여자가 경기를 망쳤다”라는 망언에 가까운 보도를 했다. 그러나 동료 여성들은 경마장에서 쓰러진 에밀리보다 “왕의 말이 다쳤다!”고 부르짖던 관중에게 더 충격을 받아.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은 여성들의 분노와 슬픔의 퍼레이드가 되지. 그들은 십자가를 들고 행진했으며, 여성참정권 운동에 온갖 야유와 조롱을 던졌던 영국판 ‘개저씨’들 중에도 모자를 벗고 조의를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은 여성 투표권 운동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역사에 남게 돼.

아빠는 지금 선거 개표 방송을 보면서 이 글을 적고 있어. 투표소에 들어가 선명하게 찍히는 붉은 기표를 보면서, 이 한 표가 재산과 신분과 성별과 지역과 피부색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권리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리서리 맺혔던 핏방울을 떠올리기도 했다. 세상엔 진리가 숱하겠지만, 그중 가장 명백한 진리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일 것이다. 아빠와 엄마가 산보하듯이 걸어가서 내리누른 붓두껍 하나에는 수많은 피눈물과 한숨이 녹아들어가 있어. 우리가 물처럼 마시고 공기처럼 들이켜는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찾아야 할 오아시스였고 깊은 물에서 겨우 빠져나와 들이마시는 공기였다는 것, 우리 딸이 꼭 기억해주기 바란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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