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도의 4월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던 겨울의 온화함이 완전히 물러가고,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수은주를 그저 손가락 물고 쳐다볼 수밖에 없는 계절이다. 인도 여행 산업의 성수기가 끝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와 양 작가는 어느 해 3월 초 고아의 팔롤렘 해변에서 두 주를 보낸 후 멀고 먼 함피를 찾아갔다가 4월에 다시 팔롤렘 해변으로 돌아왔다. 3월에도 이미 여행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4월의 팔롤렘은 거의 우리만의 해변이었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우리는 동네에서 제일 싼 탈리(2종 이상의 커리와 밥·차파티 등이 나오는 인도식 백반) 가게에 앉아 그럴듯하고 맛있는 1달러짜리 저녁을 먹었다. 그 남자, 바실리예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예의용 미소를 날리지 않는 무뚝뚝해 보이는 모습에 동유럽에서 온 여행자가 아닐까 싶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바실리예였다. 그의 첫마디는 여행자들 사이에 널리 합의된 예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는데, “너흰 어디서 왔니?”가 아니라 “너희 일본 사람이니?”였다. 사실 이건 용기 있는 행동이기도 하다. 서양인이 중국인과 일본인·한국인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힘들 뿐만 아니라 잘못 찍었을 때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여행을 하며 마음속으로 수집하는 ‘새로운 것들’ 중에는 ‘내가 만난 첫 번째 모리셔스인 여행자’ ‘첫 번째 멕시코계 캐나다인 여행자’ 등이 있는 법이다. 바실리예는 내가 만난 첫 번째 세르비아 사람이었다. 또 이 친구는 자기 식사에 포함된 커드(인도식 요구르트)를 우리에게 양보하려고도 했다. 이른바 비건(엄격한 채식주의자)이었다. 또한 바실리예는 내 짐작대로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내향인이었다. 이때 나와 양 작가는 신나게 떠들고 놀기보다는 휴식과 충전이 필요한 상태였기에 어울려도 이런 친구하고 어울리고 싶었다.

심하게 더워지는 날씨 탓에 인도 여행 성수기는 4월이면 끝난다. 위는 고아의 팔롤렘 해변.

헤어질 때 바실리예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어디 좋은 곳에서 열이나 식히자고 했다. 우리는 잠깐 볼 일이 있으니 9시30분에 우리 숙소 쪽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한 뒤 식당을 나왔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바실리예가 진짜로 나타날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양 작가는 의심하는 쪽이었다. 여행자들은 아주 쉽게 가까워지지만 헤어지는 순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를 자신의 인생에서 급속도로 지워버린다. 하지만 해변은 혼자 여행하기에 너무 쓸쓸한 장소이고, 바실리예의 눈에는 바로 그 ‘혼자 해변에 와서 쓸쓸한’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9시20분께 바실리예는 우리 숙소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방갈로 앞 테이블 주위에 앉아 일본 애니메이션, 전쟁, 조코비치(세르비아인 테니스 선수), 바실리예가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 바실리예의 꿈과 세르비아인으로 산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음 날 나는 양 작가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도 바실리예를 만날 것 같아.” 양 작가는 설마 했지만 의심은 곧 경악과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우리 숙소 앞에 찾아와 서성이는 바실리예를 발견했다. 이날은 바실리예의 숙소 앞 바닷가에 나앉아 서로의 인생과 꿈에 대해 오랫동안 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곧 팔롤렘 해변을 떠날 예정이라는 것을 안 바실리예가 도무지 우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양 작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덕분에 우리는 미래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EPA타이의 피피·푸껫·팡간 섬 등에서는 보름 때마다 ‘풀문 파티’가 열려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바다로 갈 땐 웬만하면 친구와 동행해야

‘태양과 백사장(Sun & Sands)’으로 대표되는 열대 해변은 홀로 고독을 즐기며 내적 성찰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탁 트인 시야와 광대한 바다, 눈부신 모래사장은 우리에게 “도대체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거요?”라고 끝없이 질문한다. 바다에 혼자 몸을 담그고 있자면 세상에 이리 처량한 일이 또 있을까 궁금해진다. 스노클링이나 다이빙 투어를 나가는 것도 잠시, 하루 대부분을 숙소에서 책을 읽거나 바닷가 바에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왜 해변에 와서 혼자 이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혼자서 험한 산길을 걸어가고, 이국 타향의 북적북적한 도시를 탐험하고, 장거리 버스를 타고 사색에 잠길 때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외로움을 우리는 해변에서 느낄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해변은 거의 전적으로 사람과 관련된 여행지다. 내향적인 바실리예는 해변에서 만나기 드문 예외이고, 해변은 외향성 높은 여행자의 주 무대다. 외향성 수준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는데, 79개국 연구자가 참여한 대규모 국제 연구 결과를 보면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의 평균 외향성 수준이 높게 나온다.

외향적인 서구 여행자들은 흉금을 열고 앞섶을 풀어헤친 채 새로운 사람들과 짜릿한 만남을 갖고자 해변을 찾는다. 이들은 스노클링 투어를 출발하며 첫인사를 하고, 투어가 끝나 해변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배 한 척 분량의 친구 무리를 이루어 하이파이브를 하고 저녁 약속을 잡은 뒤 숙소로 돌아간다. 저녁으로는 어부들이 그날 잡아온 이러저러한 생선과 큼직한 바닷가재·새우·오징어를 구워 먹는 바비큐 파티를 이어나간다. 이들은 술 취한 사람들이 불붙인 사다리를 돌리며 그 위로 줄넘기를 하기도 하는 ‘풀문 파티’(타이의 대표적 파티 아일랜드인 피피·푸껫·팡간 섬 등에서 보름 때 벌어진다)를 찾아다니고,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에는 사일런트 디스코(DJ가 제공하는 음악을 헤드폰으로 들으며 춤을 추는 디스코)를 찾는다.

이 정도로 외향적이지는 않은 사람들, 그리고 성품은 외향적이지만 젊은 사람들과 이렇게 격렬하게 어울려 노는 것을 꺼리는 중년 이상의 여행자들은 대부분 친밀한 사람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해변을 찾는다. 해변이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한다면 태양·모래·바다·물놀이·해산물·바·숙소·리조트·독서 등 해변 여행지의 모든 요소가 전부 아늑하고 오붓하게 느껴지며 행복을 더해준다. 다시 말하지만 해변은 전적으로 사람과 관련된 여행지다.

하지만 마음이 맞는 여행자를 만나는 경험은 매우 드물고, 그래서 특히 강렬한 추억이 된다. 바실리예는 팔롤렘에서 우리를 만났던 일을 기대치 않았던 만족스러운 경험으로 기억할 것이다. 여러분이 혼자 여행하다가 해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리고 외향적이며 언어 장벽을 느끼지 않는 오스트레일리아인처럼 쉽게 사람을 사귀며 놀 자신이 없다면, 해변에 가기 전에 미리 친구를 만들어 함께 가는 편이 좋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친구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해변에 도착해 외로움을 타는 신세가 되었다면,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수상하지만 않다면)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말자. 내향적이지만 홀로 해변에 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바실리예가 그랬던 것처럼. 운이 좋다면 외로움은 사라지고 좋은 추억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기자명 김명철 (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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