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대해서는 언젠가 들려준 바 있으니 세세한 얘기는 생략하자. 그때 서울대생들이 목 놓아 외친 4·19 선언문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문으로 남아 있단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대한민국의 허다한 젊음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경찰의 총구 앞에 달려들던 그즈음, 그 또래의 한 젊은이와 그의 가족은 서울 인근 군부대와 경무대(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를 전전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어. 자유의 종을 난타하기는커녕, 찢어질 듯 나라를 울리는 그 종소리에 귀를 막으며 괴로워하고 있었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의 가족이었어. 이강석의 친아버지 이기붕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통령 당선자의 지위를 누리던 사람이었지. 그러나 4·19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이기붕 일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어.

어쩌면 이기붕은 그때로부터 9년쯤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전쟁 중 대한민국 정부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수십만 장정들을 소집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제공하지 않아 수만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는 비극을 야기하지.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이야. 그런데 이 국민방위군들이 쓸 보급품이 원래부터 없었던 게 아니었어. 사령관이라는 김윤근 이하 고위 장교들이 그걸 몽땅 빼돌려 배를 채운 거야. 이 사건을 수사하던 조사관은 그들의 행적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해. “이놈들이 돈을 써댔던 것처럼 물이라도 써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떤 형편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연합뉴스1957년 5월 경무대에서 촬영한 이승만 내외와 이기붕(왼쪽 네 번째) 가족. 맨 왼쪽이 이강석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병사 한 명이 아쉬운 판에 생때같은 장정들을 그렇게 생으로 굶겨 죽이고 얼려 죽였으니 그 책임자는 열 번 죽어도 부족함이 없었지.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아주 가벼운 처벌을 받았어. 사령관 김윤근이라는 자는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의 사위이기도 했거든. 하지만 수만명을 생으로 죽인 사람들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냐는 여론이 들끓었고 신성모 국방부 장관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돼. 그 뒤를 이어 국방부 장관이 된 사람이 바로 이기붕이었어. 이기붕은 국민방위군 사건 재수사를 지시했고 죄상을 밝힌 후 국민방위군 간부들을 사형에 처했어. 이런 단호한(?) 조처로 이기붕은 그 이름을 날리게 됐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 자리에까지 올랐던 거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못 가서 이기붕은 국민방위군 간부들처럼 온 나라의 공적(公敵)이 됐고 이기붕과 그 아내,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과 또 다른 아들 이렇게 네 식구는 집단 자살로 생을 마감했단다.  

부패가 온 나라를 뒤덮고 힘센 자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1950년대의 전쟁판이나 1960년의 4·19 때나 또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한때 강직했던 이기붕이 부정선거의 원흉이 되고, 부패에 대해 눈을 부릅떴던 이가 부정선거의 원흉이 되고, 그 집이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잿더미가 될 만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그런 슬픈 사회의 반영이겠지. 그래도 과거를 돌이켜 국민방위군과 이기붕의 사연을 애써 네게 들려주는 건 그래도 예전에는 ‘염치’라는 놈이 살아 있지 않았나 하는 넋두리일지도 모르겠다. 염치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야.

국민방위군 사건이 다시 군사재판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물러나긴 했지만 신성모 국방장관이 또 사위를 위해 손을 쓸 것”이라고 수군거리자 이종찬 참모총장은 재판을 공개했고 심지어 스피커를 달아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내용이 전달되게 했어. 사형 선고가 내려진 뒤에도 김윤근을 빼돌린다는 소문이 돌자 아예 총살 현장도 공개해버렸어. 국민방위군의 더 깊은 배후는 밝히지 못했을지언정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염치는 지킨 셈이야. 그 염치를 지키는 데 일조했던 이기붕의 마지막도 그래. 살아남는다 한들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없다는 ‘염치’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수만명을 굶겨 죽인 염치없는 범죄자들에게 준엄하게 사형을 선고하던 자신의, 남편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우리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한단 말이냐.”(타살설도 있긴 하지만 아빠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여긴다)

아빠가 요즘 가장 두려운 건 돈과 권력과 지위를 가진 이들이 염치를 상실하는 현상이란다. 그래도 왕년에는 잘못이 드러나면 이기붕 같은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릎 꿇는 시늉이라도 하고 엄정 처벌당하는 흉내라도 냈던 데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지도층’들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그럴 필요조차 없어져가는 것 같다는 얘기야. 영화 〈내부자들〉에서 신문사 논설위원은 ‘회장님’께 이렇게 얘기하지.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익명의 독자제공3월20일 황교안 총리의 승용차가 서울역 플랫폼까지 들어온 사진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다.

의원 딸이 아니었어도 그런 배려를 받았을까

아무리 SNS에서 시끌벅적하게 난리가 나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체팔이를 하고 있다”라고 막말한 사람은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 애국심 좋다는 국무총리는 서울역 플랫폼까지 관용차를 갖다 대고 유유자적 열차에 올라타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관을 연출하면서도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대꾸 한마디 할 줄 모르며, 수백명의 학생이 값진 목숨을 버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어도 여전히 정부는 오불관언이구나. 성 접대 혐의를 받은 전직 고관은 피해자 여성들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증거 없음’과 ‘공소시효 만료’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변호사를 개업했고, 힘 있는 분들의 술자리에 끌려 다니다가 목숨을 끊은 여배우에게 접대를 받던 이들은 지금도 어둠 속에서 킬킬대며 한세상 잘 살고 있어. 아마 그분들은 이렇게 되묻고 싶어 할 것 같아. “뭐가 문젠데? 세상 다 이런 거 몰랐어?”

얼마 전 대학 입학 면접시험장에서 “우리 엄마는 판사이고 국회의원입니다”를 외치며 금기를 범한 국회의원의 장애인 따님이 합격한 사실이 문제가 됐지. 나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는 그 엄마이자 국회의원의 말씀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아. 사실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은 그럴 수도 있겠지. 또 시험 칠 때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학교 교직원들이 발로 뛰어 대령하는 배려를 해줄 수도 있겠지. 장애인이니까. 하지만 아빠가 서글픈 건, 과연 그 장애인 학생이 국회의원의 딸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배려’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기 때문일 거야. 아니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염치를 상실한 지 오래고 “특혜가 계속되면 제도인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진 탓일 거야.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시그널〉에서 15년 전을 살아가는 형사는 15년 후 미래의 경찰에게 이렇게 질문한단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백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아빠가 그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 “그래도 그때는 형사님같이 그 사람들 응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있었잖아요. 지금은 다 포기하고 살아요. 개망나니 짓을 하든 그렇지 않든 나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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