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건모 제공기륭전자 파업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성만씨.
김성만씨는 파업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노동 가수다. 나이는 올해 50세이다. 어릴 때부터 가내수공업은 물론 알루미늄 주전자·가방·악기·가구 만드는 일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 김성만씨가 기타와 노래를 배우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했다.

“새로나가구점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조금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산재 처리 문제를 두고 회사와 싸운 끝에 겨우 14급 보상을 받았다. 그 보상비로 기타를 샀다. 그 전부터 기타를 꼭 배우고 싶었다.”
김씨는 어려서 경기도 성남에 살 때 한울노동야학에서 근로기준법 따위를 배우며 노동자 의식을 깨쳤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극심할 때라 야학은 오래가지 못하고 깨졌다. 그러다 1980년 6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신한 김종태 열사 추모제를 열면서 다시 노동자가 모였다. 그때 김씨는 지역 노동자에게 기타와 노래를 가르쳤다. 1991년, 성남 삼영전자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갈 때 그는 문화 일꾼으로서 파업 투쟁에 함께했다. ‘불패의 전사들’이라는 노래는 그때 싸우던 노동자의 모습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 1주년 기념 노동자 노래 공모에 출품해서 대상을 받기도 한, ‘불패의 전사들’의 노랫말은 이렇다.

“피맺힌 해방의 전사 포탄의 불바람 속에/가슴을 열어 민주노조 깃발을 든다/저 높은 철탑 위에서 혹한의 바람이 와도/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살아도 또 살아도 아아 노동해방 죽어도 또 죽어도/넋이라도 울부짖는다 또다시 또다시 총파업이여 /또다시 또다시 불패의 노래를.”

김성만씨의 가장 든든한 동지인 아내도 그때 만났다. 아내는 삼영전자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도 삶은 늘 고달팠다. 성남에서 장사를 하던 김씨는 결국 빚을 지고 아내와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갔다. 이천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던 그가 다시 노래를 하게 된 계기는 2003년 레고코리아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김씨는 비정규직 투쟁 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현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손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며 “나의 손 높이 솟구쳐 차별 철폐를 외친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노래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기도 했다. 투쟁에 지친 노동자는 이 노래를 부르며 힘을 얻고 파업을 승리로 이끌곤 했다. 김씨는 그때 ‘불패의 전사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나의 손 높이 솟구쳐 차별 철폐를 외친다”

김성만씨는 그 뒤 파업 현장에서 부르는 노동가요를 몇 백 곡이나 만들었다. 하지만 행진곡풍 노래만 만들지는 않았다. 송경동·김영철·박일환·김해자 같은 노동자 시인의 시를 빌려 ‘막차는 없다’ ‘군고구마 할아버지’ ‘스타킹을 파는 사람’ ‘세탁소’ 등 발라드풍 노동가요도 여러 곡 만들었다. 요즘에는 신곡이 50개나 담긴 음반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노래가, 예술이 아니라 일기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보고 느낀 걸 노래로 표현하는 거다. 할머니가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데 단속반이 와서 나물을 뺏어가는 거다. 그건 할머니 희망을 뺏는 것이지 않나. 혹은 한나라당이 집권한 뒤 대구에서 떡볶이 할머니 좌판을 엎어버린 일, 청계천에서 김밥 할머니를 발로 찬 일 등…. 그런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다.”

이런 일을 하며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다. “힘든 건 없다. 다만 이렇게 파업이 길게 가는 현장에서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김성만씨와 만났던 곳은 기륭전자 파업 현장이었다. 7월24일 현재 파업 1068일째, 김소연 분회장을 비롯한 노동자 다섯 명이 목숨을 건 단식을 46일째 이어가는 현장이었다.

기자명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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