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 복지국가를 설명할 때 내가 애용하는 문구다.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매진하는 부모들도 이 표어에 고개를 끄덕일 듯하다. 마음 한편에서 우리도 저런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분명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에선 큰 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 사연이 나온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겪는 아이들을 보면서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ARS 모금 숫자도 올라간다. 더 많은 기부가 모이기를 바라면서도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텔레비전에 나온 아이 외에도 백혈병, 뇌종양, 심장병, 희귀난치성 등 중증 질환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을 텐데 언제까지 모금에 의존해야 하는 걸까?

2월2일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약칭 어린이병원비연대)’가 출범했다. 더 이상 아이들 병원비 문제를 민간 후원과 모금에만 기댈 순 없다며 57개 단체가 모였다. 참여한 단체의 면면이 독특하다. 보통 ‘국가’를 대상으로 삼는 기구에는 사회운동 성격의 조직들이 주축을 이루는데 ‘어린이병원비연대’는 복지 현장 종사자들과 당사자 조직들이 주도적이다.

먼저 복지시설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나섰다. 서울·광주·부산 등 광역 단위 사회복지사협회가 힘을 쏟고, 서울의 경우 사회복지협의회·사회복지관협회가 망라돼 있다. 지역아동센터·한국아동단체협의회·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초록우산어린이재단·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한국수양부모협회·홀트아동복지회 등 아동 지원 조직들도 대거 눈에 띈다. ‘오랜 기간 복지 현장에서 일했지만 아직까지 어린이 병원비조차 해결하지 못한 게 송구하다’ ‘저출산 시대, 아이를 낳으라면서 이미 태어난 아이의 생명도 지키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라는 이들의 사과와 절규를 들으면 숙연해지면서 동시에 이 운동의 열정이 느껴진다.

사실 해법이 멀리 있지 않다. 중증 질환을 앓는 어린이 가족의 본인 부담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이 지원하면 되는 일이다. 2014년 기준으로 중학생(15세) 이하 어린이에게 청구된 본인부담금이 약 5000억원이다. 대부분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가 낳은 금액이다. 결국 국민건강보험이 급여 진료로 인정해주지 않아서 병원비 본인 부담을 증폭시키고 부모들을 방송국이나 복지시설에 호소하도록 내몰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어린이 병원비로 5000억원만 더 지출하면 ‘어린이 입원비 무상의료’가 구현될 수 있다. 병원비가 없어서 방치되었던 어린이들의 추가 진료를 감안하더라도 ‘5000억원+α’면 가능한 일이다. 1989년 유엔이 채택하고, 한국도 1991년에 비준한 국제아동권리협약의 첫 번째가 어린이의 건강과 생명을 보장하는 생존권이다.

돈 없어 치료 못 받는 아이들과 수십조원의 적립금 쌓아두는 정부

지난해 국민건강보험 누적 흑자가 17조원에 이른다. 2011년 이후 매년 흑자를 기록한 결과다. 국민건강보험 보장률은 2009년 65%에서 2013년 62%로 낮아지고 대신 병원비 지원으로 사용돼야 할 돈은 계속 쌓이고 있다. 매년 전체 지출의 5% 이상 금액을 준비금으로 적립하고 최종적으로 전체 지출의 50%까지 조성하라는 국민건강보험법 조항이 적립의 근거다. 이에 따르면 한 해 국민건강보험 지출이 약 50조원이므로 앞으로 25조원까지 적립금을 늘려가야 한다. 의료 비상시를 대비해 예비비가 필요하다 해도 법 조항은 과도하다. 혹시 정부가 보험료 예상 수입의 20%를 지원하는 자신의 책임을 장차 회피하려는 사전 포석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생긴다. 한쪽에선 국민건강보험 지원이 취약해 아픈 아이들이 치료받지 못하거나 부모들이 가계 파탄을 겪는데, 다른 쪽에선 수십조원의 적립금을 남겨두고 있다니 어처구니없다.

어린이 병원비, 더 이상 방치하지 말자. 오죽하면 현장 사회복지사, 당사자 조직들이 국가를 상대로 나섰겠는가. 재정도 이미 있다. 우리 사회가 ‘이것은 꼭 이루자’ 결정하면 되는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 여야 모두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을 공약으로 내건다면 총선 이후 바로 시행이 가능하다.

물론 지금 병원비 지원이 절박한 환자들이 어린이만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대대적으로 늘리면 좋겠지만, 어린이 병원비에서 성과 모델을 만들고 이를 디딤돌 삼아 다른 대상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가는 실질적 경로도 개척될 수 있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 우리도 이 문구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계기가 총선에서 마련되기를 바란다.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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