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이야.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신라의 임금 56명 가운데 초대 박혁거세왕을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어. 장장 54년(〈삼국유사〉에는 17대 내물왕이 57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고도 해). 하지만 진평왕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을 거야. 그 반세기는 지긋지긋한 전쟁으로 얼룩졌으니까.

너도 잘 아는 평강 공주의 남편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신라로 쳐내려온 것도,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하면서 불제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교훈을 내린 것도 진평왕 때야. 진평왕 스스로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소 오늘날의 북한산성까지 올라와서 고구려 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어.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를 대신해 변방의 군 복무를 대신한 가실이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끝까지 기다린 설씨 아가씨의 아름다운 사연 역시 이 진평왕의 통치기를 배경으로 한단다.

진평왕 49년(627년) 어간, 전쟁으로 골병들던 신라에 기근까지 닥쳐.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낮은 벼슬아치들까지도 배를 곯는 처지가 됐지. 나라의 곡식을 관리하는 창예창(唱翳倉)의 관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 어느 날, 창예창 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단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위)은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과 기근의 시대였다.

아마도 요즘 말로 ‘헬(Hell)신라’에 대한 왈가왈부가 한참 진행됐겠지. 그즈음을 기록한 일본의 역사책에는 ‘신라 사람들이 바다 건너 탈출해오기도 했다’고 되어 있으니, 관원들 역시 “이민이라도 가자”라고 푸념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꺼냈단다. “나라도 걱정이네만 나는 당장 내 식구들 끼니가 더 걱정이네. 식구들이 굶기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렇게 얘기했어. “우리 이 창고의 곡식을 나누세.” 둘러앉아 있던 모두가 입을 벌렸어. 이건 나라 창고를 털자는 말이었어. 그때껏 상상한 적도 없고, 또 상상했다 하더라도 몸서리를 치며 서둘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생각이 음성이 되어 자신들의 귀를 울리고 있었지. “창예창 곡식을 빼돌린다!”

나쁜 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회전이 빨라지는 게 사람이야. 그리고 못된 병일수록 전파가 빠른 법이지. 한동안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주판알을 퉁긴 후 사람들은 의기투합한단다.

“우리만 입을 다물면 돼. 기록도 우리가 하고 집행도 우리가 하는데 못할 일이 뭔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창예창의 곡식을 빼돌릴 계획을 완성하고 역할 분담까지 끝냈을 거야. 흉년 심한 어떤 고을에 보낼 구휼미와 국경의 어느 성에 보낼 군량미 서류를 거짓으로 꾸미고, 두둑한 뇌물을 통해 윗사람의 승인까지 받은 날,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분배’에 들어갔을 거야. 그런데 뜻밖의 장애물에 부딪쳐.

검군(劒君)이라는 사람이었어. 형편이 다른 관원들에 비해 나을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만 유독 검군은 그의 몫을 거절해. “나는 받을 수 없네.” 관원들은 기겁을 해서 그의 입을 바라보았지. 검군의 대답은 간단했어. “나라의 곡식을 사사로이 챙길 수는 없네.”

구성원 대부분이 불의(不義)에 동조한 세상에서 정의로운 사람들은 대개 바보 취급을 받는단다. 창예창 관원들도 그랬을 거야. “자네만 잘났냐? 우린 뭐 정의를 몰라서 이런 줄 아나?” 누군가는 흥분하며 검군의 멱살을 쥐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네”라고 걱정스럽게 충고했을 거야. 좀 더 동작 빠른 누군가는 쌀을 퍼 들고 와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어. “우리 모두 다 받았는데 자네 혼자 거절하니 뭣 때문인가. 모자라나? 양이 적다면 자네에게는 더 주지!(衆人皆受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삼국사기〉)” 이 모든 회유와 설득 앞에서 검군은 ‘웃었다’고 기록돼 있어. “내가 명색이 화랑의 낭도였는데 옳은 일이 아닌 일에 천금을 준대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소?”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있었지만, 그를 자신들의 ‘조직’에 해를 입히는 존재로 폄하하며 찍어내고야 마는 소인배들은 더 많이 있었단다. 검군의 동료들이 그랬어. 그들은 무서운 결심을 하게 돼. “이놈을 죽이지 않으면 말이 새나갈 거야.” 작당한 그들은 양심 같은 것은 손톱처럼 잘라버리고 말아.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겠노라며 술자리를 만들어 검군을 초대하고 독을 먹여 죽이기로 한 거지.

그 자리에 가기 전 검군은 자신이 모시던 화랑에게 가서 사태를 대충 설명해. 화랑은 안타까이 대답하지. “도망이라도 가지 그러나.”

ⓒ시사IN 이명익윤석열 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장(선 이)은 1월6일 검찰 인사에서 또 한 번 좌천됐다. 사진은 2013년 10월21일 법사위 국정감사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그 검사가 ‘검군의 마음’으로 버텨주기를

이 말을 들으며 아빠는 그런 생각을 해. 검군의 동료뿐 아니라 그들과 한통속인 더 큰 힘이 개입돼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지. 화랑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그런 큰 힘. 그때 검군은 이렇게 말해. “굽은 건 저들이고 곧은 건 저인데 제가 되레 도망간다면 장부가 아니지요(曰彼曲我直而反自逃非丈夫也).” 그리고 동료들이 베푼 독 든 음식을 먹고 죽어갔어.

독 기운에 온몸이 굳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검군 앞에서 그 동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녀석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악한 치들은 많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안타까워하면서 “조금만 생각을 고쳐먹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라고 혀를 차는 자들이 더 많았을 거야. “다 죽을 수는 없잖아. 처자식이 몇 명인데”라며 애써 자위하는 새가슴들이 다수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같아. 그 모두는 살인자들이었어. 살인의 공모자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생매장한 파렴치한이었어.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이 나라의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해서 야당 후보를 헐뜯는 댓글을 달고 일반 국민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협박을 퍼붓는 일이 있었어. 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반칙이었다.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지만, 곧이어 벽에 부딪치고 말았어. 장관부터 검사장까지 수사를 가로막느라 눈에 핏발이 섰고 “야당 도와줄 일 있냐?”는 윽박지름이 난무했던 거야. 검군의 동료들이 그를 어르고 협박했듯이.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말에 충실한 검군의 후예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일”이며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검찰이) 아니기에 이렇게 얘기한다”라고 호소했지만, 자신들의 악행에 가담하지 않는 동료에게 독을 먹인 창예창 관원들은 21세기에도 좀비처럼 부활해 있더구나. “정권이 물라면 물고 놓으라면 놓는 개(김영삼 정권 당시 한 검사의 토로)”처럼 정권에 순종적인 검찰은 검군의 후예들을 찍어내고 모욕하고 변두리로 쫓아버리고 말았으니까. 그 가운데 한 검사는 며칠 전 검찰직을 떠났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라고 부르짖던 다른 엘리트 검사는 아직 귀양 같은 한직(閑職)을 돌아다니고 있어. 아빠는 그분이 검사직을 그만두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더라도 “굽은 건 저들이고 곧은 건 저인데 제가 되레 도망간다면 장부가 아니다”라는 검군의 마음으로 버텨주기를 바라. 그 후로 세월이 1400여 년이나 흘렀는데, 발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쓸모 있는 모난 돌이 탐욕의 정에 쩡쩡 부서지는 꼴은 좀 그만 봐야 하지 않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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