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아이 하나도 힘겹다는 ‘헬조선’에서 아이 넷을 키운 엄마라니, 백성주씨를 처음 본 사람들이 지레 ‘슈퍼맘’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해도 해도 잘 안 되고, 해도 해도 잘 모르겠는” 일이 엄마의 일이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아이 넷을 키우며 교육운동가로 변신하기까지, 그녀는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던 것일까. 지난 12월15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사교육 탈출-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 시리즈 마지막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어릴 적에는 기술이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아버지가 엔지니어였던 데다 중화학공업단지인 울산과 여수에서 자란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 결과 공대 고분자학과에 진학했는데, 알고 보니 그 학과에 입학한 여학생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졸업하면서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당시 분위기를 좇아 결혼 이후 자연스럽게 퇴사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큰딸 소근이가 태어났다. 선천성 안면기형 장애를 안은 아이였다. 사람의 두개골은 여러 개의 뼛조각으로 구성돼 있다는데, 딸아이는 이 가운데 두세 조각이 부족해 윗이마 쪽으로 뼈가 돌출돼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나는 울면서 두려워했다. 아이의 돌출된 부위가 뇌와 관련되어 있다 보니 여러 장애가 복합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데, 도무지 미래가 어찌될지 알 수 없어서 무섭기만 했다. 돌출된 부위는 모기에 물려도 안 되고 상처가 나서도 안 된다고 했다. 넘어져서도 안 되고, 어딘가에 부딪혀서도 안 됐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장애였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소근이 같은 아이를 더 만나본 일이 없다. 기회가 닿는다면 어딘가 있을 뇌수돌출증 환자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시사IN 조남진백성주씨는 아이 넷을 키웠다. 그중 큰딸은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백씨는 한배에서 나왔는데도 모두 다 달랐던 아이들을 키우며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근이는 태어난 직후부터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 와중에 둘째인 아들 효근이가 들어섰다. 큰애를 낳은 뒤 아이를 더 이상 갖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던 터라 의외였다. 둘째에 이어 셋째 신근이도 태어났다. 그러나 큰딸에 아들 둘을 연이어 키우면서 웃어본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슬픈 일이 생기면 슬픈 게 당연하고 기쁜 일이 생겨도 곧 절로 슬퍼지는 식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느 날 몸이 이상해 병원에 갔다가 넷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순간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었다. 뭐랄까,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 한 장조차 찬란해 보였다고 할까. 말로 설명하기 정말 어렵긴 한데, 그렇게 태어난 막내 지근이는 온 집안에 웃음을 안겨주었다. 큰누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막내는 누나가 수술을 할 때면 늘 그 곁을 지켰다. 형들에게도 애완동물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재롱을 피웠다.

아이 넷을 키우면서 새삼 느끼게 된 것은, 모든 삶에는 그 의미와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큰딸 소근이는 장애가 심해서 남들보다 몸이 서너 배 불편하기는 했지만, 집념이 무척 강하고 위축되는 법이 없었다. 보통 이런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경우 엄마 뱃속에서 사산되는 경우가 많다는데, 소근이는 탄생 그 자체만으로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 셈이다.

일곱 살이 될 무렵 소근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인근 피아노 학원 중에는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왼손가락은 거의 쓸 수 없고, 오른손조차 두세 손가락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건 무리라고 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무렵, 지인이 피아노 학원을 개원했다. 새로 문을 열어서 아직 학생이 없다는 얘길 듣고 “소근이가 피아노를 너무 쳐보고 싶다 하니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만 가르쳐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나 피아노 학원 원장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가 도레미파솔라시도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이는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쓸 수 있는 손가락이 몇 개 안 되는 만큼 자신에게 맞는 연주법을 이리저리 궁리하는데, 그 집중하는 정도가 엄청났다. 아침이면 눈을 뜨는 순간부터 피아노 연습에 매달렸고, 잠이 들 때도 연주하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근이는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훈련된 관현악단과 함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한 것이다(해당 영상은 유튜브에서 ‘방소근 피아노 연주’라는 키워드로 찾아 감상할 수 있다). 그날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등과 무대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소근이는 “꿈만 같다”고 좋아라 했다.

나는 본래 ‘불굴의 성취’라든가 ‘사력을 다한다’ 따위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근이를 통해 한 인간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다. 이렇게 열중하는 게 아이에겐 매우 값진 시간이었던 듯하다. 아이는 재활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기보다 중증인 뇌성마비 친구들을 돌보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체험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하자작업장학교, 공간 민들레 등 대안학교를 택했는데 이곳에서도 소근이는 모든 과제를 직접 해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걸어서 완주하는 프로그램도 불편한 다리로 완수했다. 물론 장애가 있는 만큼 아이는 뭘 배우든 시간이 많이 걸렸다. 피아노도, 글쓰기도, 퀼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근이에게는 시간을 충분히 줘야겠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시간은 본래 소근이 것이었다. 아이는 아이 방식대로 그 시간을 쓰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아이의 날개를 섬세하게 꺾어왔구나

이쯤 되면 아마 이렇게들 짐작하실 거다. ‘장애가 있는 큰아이를 그렇게 잘 키워냈다니 나머지는 엄청 잘 키웠겠지?’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소근이 바로 아래 동생이 그랬다.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이상으로 그 아이를 괴롭혔다. 둘째한테는 큰애한테 못 해본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었다. 욕심이 주체가 안 될 정도였다. 국·영·수 학원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택견에서 플루트·국악교실, 인문학 강좌까지 아이를 내몰지 않은 데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게 통하는 듯했다. 아이가 올 100점을 맞아올 때는 흐뭇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잠자는 시간이 자꾸 늘더니 어느 날은 72시간 내내 잠만 잤고, 어느 날은 컴퓨터 게임만 했다. 그때는 잘 몰랐다. 이른바 의식 있다는 엄마가 ‘잘 기획된 자유’만을 허락하게 되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한다고 했을 때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것’만을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삶의 주인 자리를 잃어버린 채 심하게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정신을 차린 것은 ‘이러다 아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각성이 들고 나서였다. 청소년 자녀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자각이 들고서야 나는 내가 아이의 날개를 얼마나 섬세하게 꺾어왔는지 깨달았다. 당시의 나는 아이들이 미숙하고 여린 존재라는 걸 잘 몰랐다. 겉으로는 쑥쑥 자라는 듯해도 제대로 성장하기까지 아이들은 아직 갈 길이 먼 존재였다. 이 기간 부모는 ‘부모가 기획하는 배움’을 강요할 게 아니라 아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이가 무슨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최고의 대답’이 아닌 ‘최선의 대답’이라도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욕심에 눈이 멀다 보니 아이의 말이나 행동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둘째 때 이런 뼈아픈 시간을 겪은 결과 셋째 신근이를 키울 때는 모든 것을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게끔 했다. 아이는 여행도 좋아하고 보컬도 한다. 학교에서 하는 온갖 활동에도 신나게 참여했고, 이 덕분에 대학에도 수월하게 합격했다. 중학생 때 교장선생님 영향을 받아 전공은 철학으로 결정했다. 막내인 넷째 지근이는 현재 고1이다. 잘 놀기로 전교 1등이다. 성적은 당연히 거꾸로 세는 편이 빠르다. 표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사진 한번 보여드리겠다. 얼마 전 큰형이 군대에 가고, 둘째 형도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집을 비우자 “17년을 기다린 끝에 내 방이 생겼다”라며 좋아하는 모습이다(웃음).

ⓒKBS 열린음악회 갈무리백성주씨의 큰딸 방소근양이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한 모습. 이날 방양은 관현악단과 함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다.

신기하지 않나. 한배에서 나온 아이들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아마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다르지 않을까? 아이들을 키우며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교육은 출발선이 어디든지 간에 개별적으로 다양한 배움이 일어나게끔 시도하고, 혹 실패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기회를 제공하며, 실패를 넘어서는 실험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지난 25년간 별별 엄마도 많이 만났다. 30년 넘게 근육위축증 형제를 키우는 엄마, 자기 아이를 둘이나 키웠는데 또 둘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우는 엄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육방송에 나오는 ‘오늘의 식단’대로 해 먹이면서 아이 둘을 과학고에 보냈다는 엄마도 있었다. 한때는 ‘나만한 엄마가 있겠나’ 싶었는데, 다 착각이었다. 한국에는 눈물 콧물을 뿌려가며 애쓰는 엄마라는 종족이 따로 있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문제는 이런 엄마들이 감당하기 힘든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온갖 고비를 겪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얼마 전 영화 〈마션〉을 보니 주인공 대사가 꼭 내 마음 같더라. 화성에 홀로 남아 지구로 귀환하기를 애쓰던 주인공은 누군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나요?”라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아니요. 그냥 하나의 문제가 생기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해결하고, 그다음 문제가 생기면 또 그걸 해결하곤 했지요.”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그랬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는 수밖에 없었다. 늘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나름 버티고 견뎌도 안 되는 게 있더라. 아이들을 둘러싼 입시와 경쟁이라는 괴물이 그것이었다. 대입 수능 고사장에 아이를 넣어본 부모라면 아실 거다. 고작 몇 시간 내에 아이 인생의 모든 게 결정 나버릴 것 같은 그 미칠 듯한 불안감을. 그러니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놀기 대장인 막내아이도 요즘엔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는 듯하다. 고3이 다가오면서 입시 경쟁이라는 굴레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이들이 생명의 빛을 잃어간다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합시다

내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모금활동가로 일하게 된 것도 이런 깨달음 때문이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나는 발도로프 교육이나 도시형 대안학교 등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후문 쪽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며 계절 따라 다양한 박물관이나 미술관·과학관을 견학하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진로 탐험을 하기도 했다. 그 뒤 공부방이 안정되고 지역아동센터로 전환되면서 ‘내가 하고 싶고,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찾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지금의 교육운동인 셈이다.

여기, 캐나다 의회를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지난 세기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 격리해 기숙학교에 수용했던 것에 대해 총리와 의원 전원이 머리를 숙여 공식 사과하는 사진이다. 나는 우리 또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국·영·수 점수대로 아이들을 줄 세워 잘하는 아이에겐 상을 주고, 못하는 아이에겐 지속적으로 열패감을 심어주는 교육은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 아이가 원치 않는 공부를 강요당하면서 지속적으로 날개가 꺾이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그 의미가 무언지 몰라 발버둥 치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하게 안다. 아이들과 함께한 지난 25년간은 내게 너무도 값지고 귀한 삶이었다. 한국의 교육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바꿔내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고 훗날 서로를 격려할 수 있게끔 용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백성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모금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