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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역량을 드높이는 방법

국립극장 산하 국립창극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창극을 연극이나 오페라 연출가가 연출하거나, 국악 지휘를 서양음악 지휘자가 하는 식이다. 국악 현대화 작업의 일환이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제4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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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족보와 계보의 음악이다. 누가 누구의 자손이고, 누구의 음악을 계승했고, 누구에게 사사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가 어떤 국악인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도 주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 전국의 대학에 국악과가 생기고 국악 관련 단체가 생겨도 국악계 특유의 ‘순혈주의’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런 국악계에서 거침없는 파격 행보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국립극장 산하 국립창극단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이다. 외부에서 젊은 피를 수혈하는 데 거침이 없다. 심지어 창극을 연극 연출가(고선웅)나 오페라 연출가(이소영)가 연출하기도 한다. 국악 지휘를 서양음악 지휘자(최수열)에게 맡기거나, 연주곡을 서양음악 작곡가(김택수)에게 쓰게 하기도 한다.

고선웅 연출가는 우리의 전통 마당놀이를 연극적으로 잘 활용하기로 유명하다. 선과 악을 명확히 가르고 대립하는 구도를 취하는 대신 마당놀이 특유의 어우러짐으로 극을 풀어낸다. 국립창극단은 이런 고선웅 연출가의 장점을 살려 판소리 <변강쇠전>을 재해석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연출하게 해서 높은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국립창극단은 계속 새로운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이소영 연출가는 요즘 클래식계에서 주목받는 오페라 연출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판소리 가운데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이 복잡해 극으로 만들기 몹시 어려운 작품으로 꼽히는 <적벽가>를 창극으로 만들었는데, 기하학적인 무대를 활용한 매우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웬만한 오페라 무대보다 더 파격적이라 무대만 보면 뮤지컬 같은 느낌을 준다. 무대보다 더 놀라운 것은 스크린 영상이었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영상을 스크린에 투사해 동양적 정서를 이끌어냈다. 관객들은 창극을 보며 오페라나 대작 뮤지컬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국립극장 홍보팀</font></div>클래식계에서 주목받는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씨가 연출한 창극 <적벽가>. 기하학적 무대를 활용해 판소리 <적벽가>를 파격적으로 바꿔냈다.  
ⓒ국립극장 홍보팀
클래식계에서 주목받는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씨가 연출한 창극 <적벽가>. 기하학적 무대를 활용해 판소리 <적벽가>를 파격적으로 바꿔냈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정의신(<코카서스의 백묵원>), 한태숙(<장화홍련>) 등 전위적인 연출가로 꼽히는 사람들과 작업해왔다. <아비. 방연>(11월26일~12월5일)도 연극계의 대표 콤비로 꼽히는 극단 ‘죽도록달린다’의 서재형(연출)·한아름(극본) 부부에게 맡겼다. <아비. 방연>은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을 호위한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단종의 총애를 받던 그가 딸을 위해 악역을 맡았다는 설정으로 갈등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스 희곡 <메디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국악기로 ‘렛 잇 고’ 부를 뿐이라고?

새로운 국악을 꿈꾸는 시도는 국악계에 꾸준히 있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설 국악단체들이 주로 맡았다. 국악의 현대화 사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은 바로 <아리랑>이다.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은 전통 민요가 아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위해 만든 창작곡이다. <아리랑>은 서양 작곡을 배운 음악가가 우리 전통 민요를 응용해서 만든 노래다.

하지만 퓨전 국악은 용기가 필요한 시도다. 퓨전 국악을 폄훼하는 국악인들은 그동안의 성취에 대해 “국악기로 연주하는 노래가 ‘렛 잇 비’(비틀스)에서 ‘렛 잇 고’(영화 <겨울왕국> 주제가)로 바뀌었을 뿐이다”라고 야박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퓨전 국악을 국립단체에서 시도하기는 더 어려운데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지금까지 이룬 성취가 주목할 만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국악관현악단은 존재 자체가 퓨전이다. 국악기를 가지고 서양식 오케스트라 시스템을 구성한 것은 겨우 50년 전의 일이다. 1965년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고 1985년에 KBS국악관현악단이, 1995년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 예전 궁중에서 하던 정악을 보존하는 일은 국립국악원의 정악단이 맡았다. 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서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국악 현대화 작업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보통의 퓨전 국악과 접근법이 다르다. 그동안의 퓨전 국악이 서양음악의 역량을 국악기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면,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의 역량을 서양음악의 방식을 동원해 표현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11월5일 국립국악관현악단 20주년 기념 공연 <리컴포즈>에서 연주한 <아카데믹 리추얼-오르고 또 오르면>이 대표적이다. 이 곡은 문묘제례악을 재해석한 곡으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 작곡가인 김택수씨가 작곡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국립극장 홍보팀</font></div><변강쇠 점 찍고…>의 고선웅씨(왼쪽), <적벽가>의 이소영씨(오른쪽)는 국악계 외부에서 수혈된 인사다.  
ⓒ국립극장 홍보팀
<변강쇠 점 찍고…>의 고선웅씨(왼쪽), <적벽가>의 이소영씨(오른쪽)는 국악계 외부에서 수혈된 인사다.

서양음악 작곡가 중에서도 김택수씨의 음악 이력은 독특하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전형적인 과학도였던 그는 서울대 작곡과에 편입한 후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작곡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반 작곡가들과 곡이 많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국악 오케스트라 곡을 연주해 특히 관심을 모은다. 이전에 대금곡과 해금곡을 작곡한 이력이 있는 그는 “물리학이 철학과 맞닿아 있다면 화학은 언어학과 맞닿아 있다.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화학이다. 음악에서도 자연에 있는 것을 인위적인 소리로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음악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화학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국악의 현대화에 서양음악 작곡가들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은 작곡가 윤이상이다. 그의 곡들은 세계적인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서양음악 작곡가들은 국악 작곡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작곡에 대한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은 건축을 하듯이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곡을 구축해 나가는 방법을 쓰지만, 국악은 흐름과 선율을 중시한다.

서양음악 작곡가로서 국악 작곡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 김택수씨는 “외국에서 활동해보면 내가 누군지가 중요해진다.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을 기대할 때면 ‘국악은 지금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이다. 서양음악 하는 작곡가들은 ‘국악의 현대화는 윤이상으로 족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윤이상 선생은 그 시절에 맞는 현대화를 했고 (나는) 지금 시대에 맞는 국악 현대화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문묘제례악은 유학자들이 공자 등 대표 유학자에게 바치는 곡으로, 일종의 ‘개학식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선학에 바친다’는 의미를 갖는 문묘제례악에는 끝을 살짝 올리는 추성이 있다. 서양음악의 글리산도와 비슷한 기법인데 김택수 작곡가는 이를 여러 스타일로 변주했다. “문묘제례악은 굉장히 단순한 음악이다. 음이 32개밖에 되지 않는다. 음정의 패턴을 분석하고 비율을 산출했다. 첫 부분에서는 이런 문묘제례악의 특징을 보여주고 이를 계속 변주해나갈 생각이다. 퓨전을 퓨전답게 만드는 것은 정직한 리듬이다. 비율 변화를 통해 낯설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려고 한다. 글리산도를 길고 은은한 글리산도와 짧고 강한 글리산도 등 다양한 형식으로 들려줄 생각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은 퓨전 밴드 어어부프로젝트의 음악처럼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김택수 작곡가는 국악의 모호한 특성이 오히려 현대음악과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며 이를 다시금 화학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현대 화학의 중요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양자화학이다. 양자화학의 기본 개념은 어떤 입자가 여기에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확률을 산출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국악의 모호성과 비슷하다. 음인지 음이 아닌지 불분명한 속성과 닮았다.”

김택수 작곡가가 쓴 이 난해한 곡을 지휘할 사람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 최수열씨다. 그는 지난해에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았다. 서양음악 지휘자들은 대체로 국악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최수열씨는 “전혀 모르는 분야였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설득당한 이유는 국악이 아니라 현대음악의 관점으로 보라는 말 때문이었다. ‘굉장히 새로운 색깔을 가진 악기’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관점에서 작업을 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의 경험 때문인지 최수열 지휘자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모습이었다. 그는 “국악은 서양의 오선지 악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음악이다. 국악을 악보로 보고 상상한 뒤 실제 음악을 들어보면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악보 사이사이에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이 악기의 특징을 알려주고 소리를 들려주며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아카데믹 리추얼-오르고 또 오르면>은 서양음악을 해왔던 김택수씨(오른쪽)가 문묘제례악을 재해석하고, 최수열씨(왼쪽)가 지휘를 맡았다.  
ⓒ시사IN 조남진
<아카데믹 리추얼-오르고 또 오르면>은 서양음악을 해왔던 김택수씨(오른쪽)가 문묘제례악을 재해석하고, 최수열씨(왼쪽)가 지휘를 맡았다.

이번 <리컴포즈>에서 최수열 지휘자는 정통 국악 작곡가 김성국씨와 클래식 작곡가 김택수씨의 곡을 둘 다 지휘한다. 둘의 차이를 그는 이렇게 비교했다. “작곡가의 특징은 보통 악보에 나타난다. 브람스는 브람스만의 그림이 있고 요한 스트라우스는 요한 스트라우스만의 그림이 있다. 이번에 연주하는 두 작곡가의 음악에서도 특유의 그림이 보이는데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나위는 연주자의 자유로움을 강조한 방식인데 김성국 작곡가는 이를 일정한 틀에 넣어 안정화시켰다. 문묘제례악은 정형화된 틀이 있는 음악인데 김택수 작곡가가 이를 자유롭게 변주시켰다.”

“국악의 역사는 혁신의 역사였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현대화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11월26일 공연될 <마스터피스>에서는 울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김홍재씨가 지휘를 맡는다. 신임 임재원 국립국악관현악단 음악감독은 “오늘은 새로운 음악이지만 내일이면 그 곡이 전통이 된다. 국악의 역사는 그렇게 혁신의 역사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퓨전이 종착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드라마로 치면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 상주 작곡가 제도를 시행할 예정인데, 서양음악 작곡가 한 명과 국악 작곡가 한 명을 둘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국립극장도 이런 국악 현대화 작업을 계속 후원한다는 방침이다. 안호상 국립극장 극장장은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전통음악을 가장 잘 지키고 있는 나라로 평가받는다.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음악은 너무 서양음악에 맞춰졌다. 서양 클래식이 독일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듯이 우리 방식의 국악 현대화를 통해 국악이 아시아 음악을 세계화하는 데 구심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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