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다름 아닌 ‘좋은 아이들’이다. 좋은 아이들을 데려와야 고생도 안 하고 보람도 느낄 수 있다는 말들을 한다. ‘고생을 안 하고 보람도 느끼는’의 주어는 물론 교사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합격 커트라인이 5점만 높아도 학생들의 ‘꼴’이 달라지고 교사의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러니 신입생 유치에 실패하면 그해 교육은 ‘꽝’이다. 시작부터 실패를 예정해놓은 셈이다. 이것이 과연 교육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특성화고(전문계고)와 인문고의 신입생 유치 작전도 전쟁을 방불케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정부가 기업의 협조를 받아 고졸 취업자를 우대하자 인문고에 들어갈 자원 상당수가 특성화고를 지원하면서 인문고에 비상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 잡기가 어려운 현실이 더 큰 변수로 작용했을 수 있다. 특성화고는 인문고보다 학생들을 먼저 선발한다. 그 결과 전문계고에서 떨어진, 성적이 ‘바닥’인 학생들이 인문고에 입학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입시 유인책이다. 특성화고는 대기업이나 공사 혹은 은행 등에 취업한 학생들을 첨병으로 내세운다. 반면에 인문고는 세칭 일류대 합격자 수를 무기로 삼는다. 서로 양상이 다른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숫자가 전체 학생의 50분의 1 혹은 100분의 1도 안 된다. 학교는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다. 이것은 교육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박해성 그림

학교가 우수한 소수 학생만을 위한 곳이 되는 것은 다수 학생이 삶의 중심부에서 소외됨을 의미한다. 이는 대다수 학생에 대한 교육의 포기이자 엄연한 직무유기다. 이러한 학교의 그릇된 행태가 더 문제 되는 것은 학생들의 삶(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누군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면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신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이것이 왜곡이다.

교육의 실패는 인간의 실패로 이어진다. 내가 실패하지 않았음에도 교육의 실패가 나의 실패를 규정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 사회가 권력과 부를 손에 쥔 소수만을 위한 사회가 될 때 다수의 개인은 실패하지 않았음에도 실패자가 된다. 평범한 다수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아이들’만을 위한 학교는 나쁘다

교육학의 개념 중 ‘잠재적인 교육과정’이라는 용어가 있다. 학교에서 의도한 바가 없는데 하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 가령, 교사가 평소 학생들을 공평하게 사랑한다면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교사가 공부를 잘하거나 인성이 좋은 학생들에게만 관심을 갖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처음에는 불만이 생기거나 억울한 심정에 기도하겠지만 차츰 삶이란 본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별 잘못도 없이 자책감에 사로잡혀 살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엄연한 오류요, 실패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확정 고시되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 며칠 전, 교육부 관계자들이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못하고 망신만 당했다는 기사를 접하며 마음이 씁쓸했다. 누가 봐도 아닌 것을, 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다.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다수를 위한 평등 교육이 아닌 극소수를 위한 엘리트 교육을 해온 탓이다. 이런 엘리트 교육의 수혜자들이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지금이라도 서둘러 위대한 평민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한다. ‘좋은 아이들’을 찾으러 다닐 것이 아니라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좋은 아이들’만을 위한 학교는 나쁘다.

기자명 안준철 (순천 효산고 교사·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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