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가 그게 뭐니? 글씨는 인성인데.” 벌써 몇 번째 지적인지 모른다. 상담실에 들어올 때부터 시작된 꾸중이었다. 아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마디, 자리에 앉아 다리를 오므리지 않았다고 한마디, 출석부 사진이 웃으며 찍히지 않았다고 한마디, 급기야 상담지에 쓰인 글씨가 삐뚤삐뚤하다고 ‘인성’ 얘기까지 나왔다. 펜을 쥔 아이의 손이 멈췄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럼 엄마가 쓰라고!” 아이의 반격, 어머니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의기양양해진다. “누가 어른 앞에서 큰소리 내라고 했어?”

주눅 든 아이 곁에는 무서운 부모가 있다. 무섭다는 말이 꼭 호되게 혼을 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소한 지적도 아이를 움츠러들게 한다.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당한 아이의 마음은 괜찮지 않다. 글씨 하나를 쓸 때도 ‘못 쓰면 혼날 텐데…’ 하는 두려움이 각인돼 일상적인 행동조차 소심해진다. 실제로 열 여덟아홉 살인데도 자기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 이런 친구들을 상담하다 보면 대개 부모가 아이를 강하게 통제하는 경우가 많다. 친구와 길을 가다 우연히 부모와 마주칠 때에도 걸음걸이부터 옆에 있는 친구까지 ‘엄마 심사대’에 올리게 되니 아이는 소심해질밖에.

ⓒ박해성 그림

부모로서는 자식의 사소한 습관부터 주변 친구까지 통제하고 싶을 수 있다. 그 근간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상이 있다. 문제는 아이의 개성보다 어른의 이상을 중시할 때 발생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원하는 모습들을 강요하다 보면 아이는 순식간에 ‘가르칠 게 많고’ ‘아직 한참 먼’ 문제투성이가 된다. 성격이 ‘소극적’인 것도, ‘싹싹하지 못한 것’도, ‘성실하지 못한’ 것도 전부 고쳐야 할 일이 된다. 아이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신뢰받기보다는 부모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란 아이가 자존감을 키워가기란 쉽지 않다.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이상에 맞춰넣으려 할수록 더욱 그렇다. 교우 관계의 어려움으로 우울해하던 고2 학생이 있었다. 부모는 상담 때마다 “우리 애가 사교성이 좋은 아이”라고 주장했고, 아이에게는 항상 ‘밝고 타의 모범이 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문제 상황을 알게 됐을 때 부모는 “네 성격이 밝지 못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다”라고 아이를 훈계했다. 아이는 “성격이 밝아지고 싶지만 저도 그게 잘 안 되는데, 다들 제 탓이라고만 하니까, 저도 제 성격이 안 고쳐지는 게 답답해요”라며 속상해했다. 위로를 얻기는커녕 아이는 교우 문제에 이어 부모에게까지 배척당했다는 감정이 가중됐다. 뒤이어 부모는 “생일 때 반 친구들을 다 불러서 파티를 하자”라며 친구들을 초대할 것을 요구했다. ‘친구가 없다’는 아이의 말에 “엄마가 친한 학부모들의 자식이 있다”고 친해질 것을 강요하거나 “성격을 바꿀 노력을 안 하니까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라고 다시 한번 비난을 가했다.

남들 보기에 괜찮은 자식 만들려다가…

부모가 원하는 자녀상을 달성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성격이 밝거나 밝지 않은 것이 교우 관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모는 자신이 아이의 성격과 교우 관계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것이 다 맞겠지만, 엄마가 원하는 그런 게 될 수 없는데 듣지를 않으신다” “다 내가 문제인 것 같다”라며 자학적인 모습을 보였다. 부모가 제 자식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이상을 강요할 때, 아이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신뢰받을 곳이 없어진다.

사소한 간섭이 누적되면 사소한 결정에도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될 것이고, 성격 전반에 대한 통제가 이어지면 아이의 자아존중감을 앗아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내 아이가 ‘남들 보기에 괜찮은’ 자식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기보다는 과할 경우 아이의 자존감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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