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정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강화 협상이 결렬되고 14만 일본군이 재침략을 시작하자 조선은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어. 특히 첫 침략 때는 별다른 참화를 겪지 않았던 전라도 남해안 지역은 정유년에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한 후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져들어.

전라도를 맡은 조선군 장수는 전라 병사 이복남이었는데, 일본 대군이 들이닥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이였어. 하지만 그 대담한 사람도 남원성으로 가기 전 곡식 창고를 모조리 불태우라 명령했지. “어차피 적의 것! 태워 없애라.”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어떻게든 옮겨두면 요긴한 식량을 깡그리 불태워버린 건 이복남 역시 당황했기 때문일 거야. 자신들이 농사해서 쌓아올린 곡식에다가 우리 군대가 불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 조선 백성은 무슨 생각이 들었겠니. 그저 공포였겠지. 남은 것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었어. 무슨 수를 쓰든 나라의 방비나 법의 보호나 체제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사람들은 무질서하게 쏟아져 나와 피란에 나섰고, 각처에 남아 있던 수비군도 자기 식구들 건사하기 위해 임무를 팽개쳤으며, 사또들도 도망가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관아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어. 그 혼란한 와중에도 전라도 남해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지. 이순신이야. 휘하 장교도 군대도 없는 허울뿐인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그는 일본군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곳곳을 누비며 망해버린 수군을 재건해보려고 발버둥 쳤어. 그가 쓴 〈난중일기〉를 보면 무표정할 정도로 담담하지만 참혹한 가슴을 꾹꾹 눌러 쓴 듯한 구절들이 눈에 뜨이지. 이를테면 이런 거. “패잔병들에게 말 세 필, 그리고 활과 화살을 빼앗아왔다.” 해군 사령관이 도망 다니는 탈영병의 무기를 빼앗아 장비를 챙기는 모습.

 

ⓒ연합뉴스1597년 9월 명량해전은 이순신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사진은 ‘2014 명량대첩축제’에서 명량해전 당시를 재연하는 장면.
8월5일 일기에는 전라도 곡성군 옥과 근처에서 피란민을 만난 기록이 나와. “피란 가는 사람들로 길이 찼다. 놀라운 일이다.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下坐開諭)’일 거야. 높은 말안장 위에 앉아 “모두 들으라!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서 내려 피란민들 틈에 들어가 설득하고 달랬다는 거야.

피란민도 이순신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 백전백승의 명장이었다지만 지금은 배도 군대도 없는 허깨비. 더욱이 엄할 때는 말도 못하게 엄했던 이순신이었어. 하지만 그런 장군이 말에서 내려 자신들을 위로하고 설득할 때 사람들은 더 감동받았지. 이 양반은 남한테만 엄한 게 아니라 자기 책임도 다하는 사람이구나. 믿을 수 있겠구나. 1597년 8월9일의 〈난중일기〉에서 아빠는 이순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가져다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먹이며 강권하는 것이었다.”

 

ⓒ연합뉴스9월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경제 부진의 책임이 노조에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지금 머릿속에 맴도는 이순신의 한탄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士爲知己者死),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화장을 한다(女爲悅己者容)”라는 말이 있어. 네가 들으면 “선비? 여인? 웃겨!” 하겠지만 까마득한 옛날 사람 얘기니 용서해주기로 하고, 아빠는 이 말에서 요즘 말하는 ‘리더십’의 윤곽을 잡는단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자신을 아낀다고 믿는 사람을 위해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게 되어 있어. 자신을 알아준다고 믿게 하는 과정,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길이 험하고 고독한 지도자의 길이겠지. 이순신에게 술 권하던 노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또 다른 일기에서 유추해볼 수 있어. “울면서 ‘사또가 이제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습니다’ 하였다(8월6일 〈난중일기〉).”

박박 긁어모은 배 13척으로 다가드는 일본군 대함대와 정면 격돌을 앞둔 9월15일 밤. 이순신은 꿈을 꾸지. 신선이 나타나서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라고 가르쳐줘. 이때 신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아빠 생각으로는 이순신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아. “네가 선봉에 서라. 네가 죽고자 하면 부하들이 살 것이고 네가 살고자 하면 모두 죽는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면, 1597년 9월16일(음력) 벌어진 명량해전은 실로 이순신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거든. 진도와 해남 사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살이 세고 좁은 물길에서 이순신은 역류를 버티기 위해 닻을 내려버리고 자신의 배만으로 일본군을 막아서. 〈난중일기〉에 적은바, 장수들도 “낙심하여 회피할 꾀만 내는” 상황에서 총사령관이 홀로 나선 거야. 물러서 있긴 했지만 장수들은 도망가지도 못했어. 상관의 사투를 지켜보면서 그들 역시 그들 안의 비겁과 싸우고 있었던 거야. 장수들뿐 아니라 병사들, 노 젓는 격군들 모두의 가슴에서 탁탁 불꽃이 튀고 “도망가면 어디로 가서 살 것 같으냐?” 하는 이순신의 절규가 기름을 끼얹었을 때 13척 미니 함대는 그야말로 하늘나라 군대가 돼서 일본 함대에게 천둥처럼 들이닥치게 돼. 명량해전의 기적이지.

엄할 때는 서릿발 같지만 그 기준에 공감할 수 있고, 자신에게도 그만한 엄격함을 보여주는 리더십. 고달픈 상황을 만든 사람에게조차 책임을 돌리지 않고(원균을 싫어했던 이순신이지만 적어도 명량해전까지의 일기에서는 원균에 대한 원망은 일절 비치지 않아. 남이 하는 얘기를 들을 뿐이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제시할 줄 알며, 최악의 상황에서는 자신이 부서질 각오로 위기에 맞서는 리더십.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진귀한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이야.

얼마 전 여당 대표께서 또 한 번의 파격 발언으로 뉴스의 중심이 됐지. “노조가 파이프 휘두르지 않았으면 국민소득 3만 달러….” 이 말을 들으며 아빠는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장수들은 죄다 그런 식이었거든. “신은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무개 때문에….” 뭐 이런 장계는 임진왜란 내내 썩어날 정도로 많아.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왔다 갔다 해(유럽 복지국가들은 50%를 우습게 넘지). 그 10%가 나라를 좌지우지했다는 말도 어이가 없지만, 그 정치인은 이익과 생존을 둘러싼 집단 간 충돌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것이 정치의 본래 책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오히려 책임을 노조에 갖다 안기는 행보를 당당하게 하고 계시는구나. 임진왜란 때 조선의 흑역사를 장식한 여러 졸장들의 리더십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흔치 않았던 이순신이지만 간간이 인간적인 불만을 쏟아내곤 했지. 한 번은 사사건건 비위를 건드리던 경상우수사 배설을 두고 이렇게 써. “자기가 감히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 국가의 일을 그르치는데 조정에선 살피지를 못하니 이 일을 어찌하랴. 이 일을 어찌하랴.” 이순신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조정의 리더십을 한탄한 거야. 왜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은 진귀하기만 하고, 똬리를 틀고 한 백년 해먹는 고약한, 리더 아닌 지배자들은 어찌 그리도 흔한지. 이순신의 한탄은 옛 얘기가 아니야.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 국가의 일을 그르치는데….”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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