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검역이 재개된 미국산 쇠고기 재고분이 단체급식(위)을 통해 유통되리라는 염려가 많다.

촛불이 소비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미국과 재협상을 통해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을 ‘원천 차단’하려는 시도는 일단 물 건너갔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던 촛불대오는 다시 학교와 가정에서 ‘2차전’을 벌일 태세다.

2차전의 무기는 눈과 귀, 그리고 호주머니다.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이는 한편, 국내에 수입된 쇠고기가 안전하게 유통되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감시할 작정이다. 당장 정부가 내놓은 원산지 표시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 같다.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이 학교와 음식점 등 쇠고기가 유통되는 ‘현장’을 밝히는 셈이다.

미국산 쇠고기에 ‘엄마가 뿔났다’

싸움의 선두에 선 건 역시 학부모다. 지난해 10월 쇠고기 등뼈가 발견돼 검역이 중단된 채  부산항 등 전국의 냉동 창고에 보관 중인 미국산 쇠고기 5120t이 유통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학교이기 때문이다. 10개월 가까이 보관돼 ‘질’이 떨어지는 상품인 데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학교 등 단체급식 과정에서 소화되리라는 염려가 크다.

실제로 학교 현장은 이미 뒤숭숭하다. 요즘 들어 참교육학부모회 등 관련 단체에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인한 상담이 잇따른다. 최근 미국에서 ‘O-157’ 식중독균이 검출된 쇠고기에 대한 리콜 조처가 내려지면서 이런 걱정은 더욱 커졌다. 경기도에 사는 한 학부모는 얼마 전 참교육학부모회를 찾아와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생이에요. 그런데 광우병 쇠고기 사태 이후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 있을까 봐 학교 급식을 잘 안 먹어요. 그래서 제가 도시락 반찬만 따로 싸서 보냈어요. 그랬더니 그걸 본 담임선생님이 ‘너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거냐’라며 아이를 야단 친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했지만, 외려 엄마에게 고자질했다고 아이가 또 야단을 맞았어요. 아이들과 학부모는 걱정이 태산인데 정작 교육 당국은 무신경하고…. 이제 우리 엄마·아빠가 나서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로 학생과 학부모는 극도로 예민한 데 비해 정작 학교 당국은 아무런 대비가 없다. 심지어 이 사태를 ‘호기’로 삼는 얌체족도 등장했다.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쇠고기 문제가 불거진 뒤 지난 한 달 동안 급식 메뉴에 고기가 일절 제공되지 않았다. 쇠고기는 물론 돼지고기까지 식탁에 올리지 않은 것이다. 이 학교 학부모는 “쇠고기 사태를 빌미로 급식업체 측이 급식비를 아끼려는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닌가”라며 반발했다. 뒤늦게야 돼지고기가 다시 식탁에 올랐지만 학부모들은 이런 상황을 방치한 학교 측을 더욱 원망한다.
 

ⓒ뉴시스7월3일 급식국본·여성단체연합 등이 미국산 쇠고기 불매·감시 운동을 선포(위)한 뒤 각계의 소비자 운동이 잇따랐다.

당연한 일이지만,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관한 한 학부모 사이에 이견은 없다. 지역과 경제 형편에 따라 특목고나 자사고 문제를 두고 번번이 의견이 갈리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 학부모 단체 관계자는 “교육 문제의 경우 강남과 강북, 부유층과 빈곤층의 의견이 달라 늘 애를 먹었는데 쇠고기에 대해선 의견이 같다. 학부모 운동을 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촛불 정국을 둘러싼 세간의 이념 논쟁과 달리 학부모 사이에는 ‘좌·우파’가 따로 없는 셈이다. 

급속히 번지는 불매·감시 운동

이같은 현장의 ‘아우성’을 접수한 참교육학부모회가 조사에 나섰다. 지난 6월13일 통합민주당 안민석 의원과 함께 서울·인천·경기 3350개 학교의 교장에게 설문지를 보내 미국산 쇠고기 사용 의사를 물었다. 교육 당국이 무대책인 가운데 현장 학교에라도 ‘자극’을 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보내온 학교는 겨우 818곳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답변을 보내지 않은 학교가 2500여 곳이나 됐다. 전은자 참교육학부모회 교육자치위원장은 “학부모와 학생의 염려와 달리 관리자인 교장들이 쇠고기 문제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게 이번 설문을 통해 드러났다”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지금 우리를 협박하느냐’라며 항의한 학교도 여럿 있다”라고 전 위원장은 밝혔다. 
 

ⓒ시사IN 한향란‘움직이는 광우병 감시단’ 소속 택시 운전기사 안종은씨가 승객에게 나눠줄 ‘원산지 표시 위반 업소 고발 엽서’를 내보이고 있다.

정부의 무대책과 학교의 무신경에 분노한 이들은 결국 ‘실력 행사’에 나섰다. 7월 들어 여러 소비자·시민 단체의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이 잇따른다. 먼저 7월3일 안전한 학교급식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급식국본)·생협·여성단체연합 등이 ‘미국산 쇠고기 유통저지 및 불매운동’을 선포했다. 7월8일에는 YMCA·환경정의·여성민우회 등 13개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농림식품부에 O-157 오염 쇠고기 작업장의 한국 쇠고기 수출 금지를 요구했다. 7월12일에는 전교조가 서울에서 ‘광우병 쇠고기 학교급식 저지를 위한 교육주체 결의대회’를 대규모로 열고 학부모 단체와 함께 쇠고기 불매·감시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환경운동연합도 7월7일 생활환경실천단 주최로 ‘움직이는 광우병 감시단’을 발족했다. 1차로 택시운전사 20명으로 구성된 광우병 감시단은 택시 안에 원산지 표시제 위반 업소를 시민이 직접 신고할 수 있는 ‘엽서’를 비치하고 이를 승객에게 나눠준다. 1700개 단체가 참여한 광우병범국민대책회의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산 쇠고기 불매·유통저지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바야흐로 촛불시위가 소비자 운동으로 급속히 번지는 추세다.

 이런 쇠고기 불매·감시 운동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까. 우선 급식국본·생협 등은 그동안 꾸준히 식품안전 운동을 펼쳐온 단체다. 상당한 노하우가 쌓인 만큼 불매운동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학교급식 조례 제정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온 급식국본은 민주당 이미경 의원·민노당 강기갑 의원 등과 함께 광우병 위험 쇠고기를 학교급식에 쓰지 못하도록 급식법 및 시·도 조례 개정 촉구 운동을 벌이기로 했
다.
지난해 ‘광우병 소비자 감시단’ 200여 명을 꾸려 활동한 생협은 이미 7월 초부터 대형 할인점과 지역 음식점·정육점 등을 대상으로 감시 활동을 시작했다. ‘경험’이 쌓인 만큼 시민의 호응도 크다. 이번에는 ‘미국산 쇠고기 거부 소비자 1만인 선언’에 이어 아예 대형 마트와 정육점 측에 ‘판매 거부 공개 선언’까지 요구할 작정이다. 생협은 특히 학교 급식 위탁업체를 대상으로 ‘미국산 쇠고기 사용 거부 선언’을 유도해 동참 업체를 적극 홍보하기로 했다. 김대훈 한국생협연대 대외협력팀장은 “급식 업체의 자정을 유도하는 운동에 많은 학부모가 동참할 것이 확실하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불매·감시 운동 얼마나 실효성 있을까

회원 상당수가 ‘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참교육학부모회도 ‘힘’을 십분 활용할  계획이다. 급식 납품업체에 대한 불시 점검을 펼치는 한편, 납품업체 선정 때 수입산을 취급하는 업체를 배제하라며 학교 측을 압박하기로 했다.
 

ⓒ시사IN 한향란대형 할인마트는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의 전초기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소비자·시민 단체의 활동에 탄력을 주는 데에는 정부의 부실한 원산지 표시 대책도 한몫한다. 정부는 대대적인 단속활동을 펼치겠다고 호언했지만 사실상 한우와 수입산 정도의 구분만 가능할 뿐, 국가 간 구별이 어려운 실정이어서 정육점이나 식당이 원산지를 속이거나 고기를 섞어 팔아도 뾰족한 해법이 없다. ‘양심을 속인’ 상인을 제어할 길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관련 단체들은 일반 소비자의 불매·감시 운동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빈파 광우병서울감시단 대표가 “쇠고기 불매운동은 단순한 네거티브 운동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신뢰를 심는 운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물론 이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경제 빈곤층에겐 미국산 쇠고기 거부운동이 ‘사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급식의 경우 수입 쇠고기 대신 한우를 사용할 경우 급식비 인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확고하다. 차라리  쇠고기 소비 자체를 줄이자는 생각이다. 전은자 참교육학부모회 교육자치위원장은 “최근 물가 상승 탓으로 급식비 인상이 어려운 만큼 수입 쇠고기를 먹을 바에야 차라리 쇠고기를 안 먹는 게 낫다. 아니면 수입산 세 번 먹느니 한우 한 번 먹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쇠고기 관련 기업, 바짝 긴장한 채 여론 주시

관련 기업은 몸을 바짝 낮추며 소비자 운동을 예의주시한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했다 홍역을 치른 롯데마트 홍보팀 나근태씨는 “여론이 지난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서 어떤 태도도 섣불리 밝히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유통업체 관계자는 “인터넷 블로그에 우리 회사와 관련해 루머가 도는지 체크하는 게 요즘 주요 업무다. 요즘 같은 판국에 이번 불매운동은 기업에 상당한 압박을 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정치권도 불매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7월8일 국회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 시식회를 열었다.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특정 위험물질만 제거하면 스테이크를 해먹어도 안전하다”라고 주장해 홍역을 치른 심재철 의원의 주도로 보란 듯이 시식회를 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국민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단체가 즉각 반발한 데 이어 다음 아고라 등 인터넷 토론장에선 한나라당이 ‘한우 불매운동’을 펼친다는 누리꾼의 성토가 이어졌다. 더욱이 같은 날 중앙일보가 자사 기자를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식당 손님으로 위장해 사진을 조작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누리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정부와 여당, 보수 언론과 학교 당국이 힘을 합쳐 이번 소비자 운동을 부추기는 형국이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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