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샤말란은 〈해프닝〉에서 아무런 표정 없이 인류를 덮친 재앙과 공포를 그린다. 그것은 지구의 미래이자 동시에 인류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 해결할 길 없이 사건만 벌어지니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해프닝〉이라는 개봉작을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섰다. M. 나이트 샤말란이라고, 〈식스 센스〉 〈빌리지〉 같은 영화를 만든, 우리 시대에 몇 안 되는 천재 감독 중 하나라 생각되는 사람의 영화였던지라 매우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자 시사회를 놓친 터라 개봉 첫날 첫 회에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첫 장면. 과연 샤말란이다. 갑자기 한 도시의 사람들이 멈춰 서더니 자해를 시작한다. 그 다음 장면. 역시 샤말란이다. 갑자기 공사 중인 고층 건물 위에서 인부들이 떨어져 자살이 이어진다. 또 그 다음 장면, 그 다음 다음 장면, 그 다음 다음 다음 장면, 역시 몽땅 샤말란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불만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저게 뭐야….” “아이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위와 같은 반응이 터져나온 건 너무나 분명한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해프닝〉에는 도무지 결말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악당이 나타나 죽이는 것도 아닌데 하여튼 알아서 죽어나간다,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도시가 삽시간에 미국 북동부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과학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식물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그러다 끝난다.

결말이 없다.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러면 관객은 열받는다. 명실 공히 드라마의 대원칙을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영화다 연극이다 싶은 건 반드시 기승전결 원칙을 따라왔다. 그래야만 뭐 하나 본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말란은 이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승전결을 거스른 첫 번째 이유, 그건 자의식 넘치는 예술가들이 제 작품을 매만지는 작가적 실험의 일환이다. 생각해보라. 인기 만점의 흥행 가도를 달렸던 〈추격자〉도 앞뒤 절단된 드라마였고, 뜻하지 않게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 〈테이큰〉 역시 스토리는 대충 얼버무리고 아방가르드한 액션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이런 영화, 요즘 많이 나온다.

외치는 자와 침묵하는 자의 끝없는 싸움

ⓒ난나 그림
둘째, 최근의 세상이란 것이 도무지 기승전결을 밝힐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논리적이고 이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앞이 이래서 중간이 이렇게 됐고 중간이 이러니 결말은 이렇게 날 거란 기승전결의 원칙은 무너져가고 있다. 기승전결이 상존하는 세상이라면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원칙의 흐름을 역추적해 해결하면 될 터인데, 도무지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만 보인다는 말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 터졌는지, 그걸 조목조목 따져봐야 묵묵부답, 세상은 외치는 자와 침묵하는 자의 해결 기미 없는 현재진행형 싸움만 반복될 뿐이다.

샤말란에게 요즘 세상은 그런 곳이다. 거기도 그렇고 여기도 그러니 한국이고 미국이고 따질 필요도 없다. 묘하게도 샤말란이 〈해프닝〉에서 그린 것은 지구의 미래이자 동시에 인류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 세상이다. 드라마에 기승전결이 없듯, 재앙과 공포도 아무런 표정 없이 인류를 덮친다. 해결할 길 없이 사건만 벌어지고 있으니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나 소스라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별별 미친놈이 길길이 날뛸 뿐이다. 같은 맥락일까? 로베르트 로드리게스의 신작 〈플래닛 테러〉에 나오는 좀비처럼 말이다. 좀비도 되기 싫고, 종말도 싫다. 정말 기승전결이 필요조차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기승전결이 필요한 세상을 거쳐야 한다. 지금 같은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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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이지훈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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