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찬아카데미가 1965년 ‘인간화’를 주제로 대화 모임을 꾸린 지 50년이 된 것을 기념해 대화문화아카데미의 강대인 원장이 대화 모임을 마련했다.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는 좋은 기회였다. 박명림 교수는 주제 발표에서 주로 비례대표의 확대에 역점을 두어 여러 안을 제시했다. ①국민 1인당 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인 의원 세비 감축 ②지구당·기초공천제 폐지의 반대 ③비례대표 증원 ④여성 의원 30% 공천 의무화 ⑤대통령 결선투표제 등이 그것이다. 장덕진 교수는 좀 더 거시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사회의 이중화(二重化)와 고령화에 따라 민주개혁이 10년 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기를 맞을 수 있다면서, 그 안에 합의제(合議制) 민주주의를 강화해 한국형 복지국가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독일이나 스웨덴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진정 민주정치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사표(死票)가 50% 가까이 나올 수 있는 단순 다수결제도를 바꾸어 비례대표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비례대표를 충분히 확대·실현하면 사회 각계의 의견이 골고루 반영되는 다당제가 되고, 그 세력들의 타협에 바탕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귀결에 이른다. 장덕진 교수의 말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당 간의 합의뿐 아니라 노사와 시민단체, 싱크탱크, 이익단체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간의 합의를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한국이 반드시 독일이나 스웨덴의 길을 가야 하느냐, 미국의 길이 익숙한 게 아니냐 하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정치 다수파는 비례대표의 확대를 내심 반가워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즐기는 지배체제에 손상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다. 대화 모임의 오랜 참여자인 미국 유학파 이홍구 박사(전 총리)는 독일·스웨덴 모델 쪽에 가담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대화 모임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의 어느 정도 ‘급진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의견을 말했다.

최근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완패하는 타격을 입고 진통을 겪고 있다. 나는 영남 헤게모니에 치여 있는 약자인 야당이 우선 당대의 합의제 민주주의를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연합정치의 구현이다. 세가 약한 쪽은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은 그 점에 둔감했던 것 같다. 물론 여권이 종북몰이 등 연합정치를 차단하기 위한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천정배·정동영씨를 왜 포용하지 못했는지, 어떤 방식으로든 ‘연합’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덜 싫은’ 정당에 투표하거나 투표 포기하는 유권자들

마침 장덕진 교수가 탈당 사태에 관해 언급한 게 있어 인용해본다. “이번 탈당 출마자들의 경우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여당 좋은 일 시킨다는 비판은 전혀 합리성이 없어 보인다. OECD 국가들의 정당 간 유효 경쟁의 정도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최하위권에 속한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 특성상 소수 정당이 별 의미가 없고 실질적으로 거대 양당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기면 집권당, 져도 제1 야당이 되는 편리한 구도에서 정당 간 정책 경쟁이 치열할 리 만무하고 경쟁이 없으면 개선되는 것도 없다. 두 거대 정당이 정책 경쟁을 소홀히 하면서 지역이나 세대에 안주하고, 상대 정당보다 한 표만 더 얻으면 집권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번갈아 잡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덜 싫은 정당에 투표하곤 한다. 이런 구도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요소가 강화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깨우침을 주는 신랄한 비판이다.

그렇다고 야당이 중구난방의 정당이 되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단일성 연합정당이 되어야 한다.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란 말도 있다. 그러는 것이 순리이고 승리의 길인 것이다. 연합의 길은 처음에는 우시장의 흥정처럼 천박하게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잘하면 그것이 타협의 예술로 승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타협의 미학이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비례대표의 확장, 합의제 민주주의의 실현 등은 우리에게 제시된 힘든 명제이다. 그러나 야당이 계속 그러한 주장을 하고, 당내에서 경험을 축적하고 성과를 국민에게 제시해줄 때 그 길은 여야 중앙정치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고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자명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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