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8월12일,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기가 군마 현의 한 산등성이에 내리꽂혔다. 사망자 520명. 일본 최악의 항공 참사로 기록된 JAL기 추락 사고다.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였던 노다 마사아키 씨(71)의 삶도 이 사고를 계기로 흔들렸다. 사고 유가족을 만나며 대형 참사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물로 나온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는 슬픔의 문제에 사회가 왜 개입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를 밝힌 기념비적 저작으로 주목받았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펜타그램 펴냄)이 출간된 것을 계기로 노다 마사아키 씨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통역은 책을 번역한 서혜영씨가 맡았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한국 사회는 다시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만하면 됐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슬픔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은 각자 다르다. 특히 세월호처럼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는 슬픔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밖에 없다. 사고 후 1년쯤 지나면 ‘언제까지 계속 죽음을 얘기할 거냐’ ‘너만 슬픈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나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유족들이 받는 사회적 관심이나 배상금에 대해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걸 정부나 외부 세력이 이용하려 들기도 한다. 유족들이 이런 데 흔들리지 말고 자기가 생각하는 바나 하려는 말을 끝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유족 모임이 중요한 것도 그래서다. 유족 혼자 이런 분위기와 싸우기는 매우 힘들다. 유족회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며 크고 작은 문제에 함께 대처할 필요가 있다. 배상 문제도 함께 얘기해 나가야 한다. 배상금에 죄책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이는 이 사회를 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한 ‘징벌적 배상금’이란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상(喪)의 과정을 잘 치렀구나’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될 때가 온다(대형 참사 유족들의 경우 ‘쇼크-부정-분노-우울-용서와 수용’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단계를 넘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슬픔의 사회화 과정을 겪음으로써 비로소 새 출발을 위한 동력을 얻게 된다고 노다 씨는 설명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상(喪)의 과정’이다).

노다 마사아키 씨(위)는 전쟁, 대형 참사 등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조사에 기반해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한국에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쟁과 인간> 등이 번역돼 있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도 있다. 이들은 세월호 선체를 인양해달라고 호소한다. 반면 기술적인 문제나 비용 문제를 들어 인양에 회의적인 여론도 있다. 유족들로서는 당연한 요구다. 시신은 유족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매개체다(노다 씨의 통찰에 따르면 ‘현대의 대형 참사에서 유족의 절망과 슬픔은 시신을 찾는 투쟁에서 시작된다’. 돌연한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죄의식을 남긴다. 유족들은 ‘나는 시신을 찾아 품에 안고 최선을 다해 장례를 치렀나’를 자문하며 자기 비난에 빠져든다. 그런 만큼 시신을 확인하는 일은 남은 가족들이 죽음의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슬픔의 치유 과정이기도 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도 인양은 이뤄져야 한다. 일본에서는 달리던 열차가 아파트에 충돌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다(2005년 4월25일 JR 서일본이 운행하던 간사이 후쿠치야마 선 쾌속열차가 궤도를 탈선해 아파트에 충돌하면서 107명이 사망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고 유족회와 JR 서일본은 최근 사고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합의했다. 아파트와 열차가 충돌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단 말인가? 200여 명에 이르는 유족 중에는 보기가 고통스러울 것 같다며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현장을 있는 그대로 남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끔 만들자’는 데 합의했다. 조만간 사고 현장에 기념관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JR 서일본 신입사원들이 입사 때 반드시 이곳 기념관을 견학해야 한다는 조항도 합의서에 넣었다. 자기 회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합의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가해자가 확실한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성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상을 먼저 얘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가해자들은 통상 책임을 발뺌하려 든다. ‘자신도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것’과 ‘사고를 잊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가해자의 일반적 전략이라고 지적하신 바 있다.

일본도 1985년 JAL기 추락 사고 이전까지는 가해자인 기업이 나서 유족들을 분열시키려 시도하곤 했다.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유족들에게 다른 희생자의 이름이나 주소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JAL기 유족회가 결성돼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선 것을 계기로, 더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기업이 없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면 유족들의 노력으로 좀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30년 전만 해도 누군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 ‘그래 봤자 죽은 사람이 돌아오겠느냐’며 포기하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유족의 한을 푸는 차원을 넘어 개개인의 억울한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형성돼 있다.
노다 마사아키 씨(위)는 전쟁, 대형 참사 등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조사에 기반해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한국에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쟁과 인간> 등이 번역돼 있다.
대형 참사에 대처하는 사회 시스템이 한 단계 성숙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물론 일본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 1988년 도쿄 만에서 일본 자위대 잠수함인 나다시오호와 대형 낚싯배인 제2후지마루호가 충돌해 3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자위대는 진상 규명은커녕 책임에서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 반면 2001년에는 하와이 앞바다에서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인 에히메마루호와 미국 잠수함이 부딪쳐 교사·학생 10여 명이 사망했는데, 당시 미국의 사고조사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채택한 조사 보고서를 보면 충돌 상황뿐 아니라 소프트한 측면의 문제점까지 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방에 수상한 물체가 목격돼도 함장에게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못하게 만든 잠수함 내부의 비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대형 참사로 이어졌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유족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죽은 자녀나 배우자, 가족에게 ‘너의 죽음으로 인해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라고 보고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인명 구조에 실패한 정부 또한 가해자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진상 규명에도 소극적인 모습이다. 정부가 좀 더 유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진상 규명이나 배상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해주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슬픔의 과정을 겪으면서 ‘함께 해나가야’ 하는데 아직 한국 사회에는 그런 인식이 부족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사회가 전쟁을 겪었고 남북이 분단돼 있다 보니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겪어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 대통령의 경우 본인도 성장기에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만큼 유족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클 것이다. 대통령이 함께 슬픔을 겪어낸다면 한국 사회 또한 훨씬 풍요해질 텐데, 그럴 생각도 없고 그에 대한 관점조차 없는 듯 보여 안타깝다. 그럼에도 지난해 9월 한국에 들렀다가 서울시청 앞에 거대한 분향소가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사회 전체가 이렇게 슬퍼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불행한 경험이 사회적 연대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슬픔을 억압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함께 슬퍼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깨달음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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