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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담비의 길, 세계를 바꾸다

‘문명의 바닷길’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액체의 역사’다. 오늘의 한국을, 오늘의 유라시아를 있게 한 문명의 바닷길을 살핀다. 바닷길은 당연히 내륙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길은 익히 알려졌으며 어떤 길은 생소하다. 익숙한 길은 그 길의 의미망을 되짚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며, 생소한 길은 잃어버린 바닷길을 찾아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원장·제주대 석좌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5년 03월 11일 수요일 제3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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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담비(sable)의 털은 예나 지금이나 최상으로 꼽힌다. 그래서 가격도 최고다. 모피 거부 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지난겨울도 세계의 많은 귀부인이 모피를 걸치고 환상적 기분에 빠졌을 것이다. 동물의 죽은 껍데기에 산사람이 대신 들어서는 독특한 문화는 아직도 전성기다. 이런 모피광들에게 검은담비는 묘한 열망을 부여한다. 담비는 족제빗과 동물로 털이 조밀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특히 최상 품질인 시베리아산은 청색 기미를 띠는데 실크 색깔의 광택도 난다.

이런 검은담비가 세상을 바꾸었다? 사실이다. 모피가 상층 위신재(威信財)가 되고, 옷을 뛰어넘어 유력 자본재가 되었을 때, 모피는 더 이상 옷감이 아니었다. 모피에 대한 인류의 뜨거운 욕망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한 것이다. 인류 문명사의 한 측면은 ‘동물의 가죽과 털을 벗겨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인류가 실을 자아 옷감을 만들어 살아온 역사보다는 동물을 벗겨서 살아온 역사가 훨씬 긴 것이다. 그래서 ‘모피의 문명사’는 유라시아 문명사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동예·발해, 더 나아가 북방의 흉노·말갈·여진 등 어느 민족이건 모피 동물의 수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피 사냥과 무역은 고대 및 중세 사회에서 경제력의 근간 중 하나였다. 그런 모피 덕에 세계사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러시아가 모피를 찾아 동쪽으로 온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어느 결에 두만강 하구에서 한반도와 접경했으며, 오호츠크 해를 넘고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까지 당도했다.

   
 
모피 무역은 러시아 재정의 10% 정도를 차지할 만큼 중요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모피 공급 국가였다. 차르는 가만히 앉아서 이 산업을 통제했다. 거대 모피업자 스트로가노프가(家)에 고용된 카자크족을 비롯한 모피 사냥꾼은 시베리아를 도륙했으며, 유럽 귀부인의 몸을 감쌀 모피를 위해 시베리아 눈밭이 피바다로 변하는 슬픈 환경 파괴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에 이끌렸던 것처럼, 러시아인을 시베리아로 유혹한 동력은 모피, 그중에서도 검은담비였다. 담비 모피는 유사 이래 절대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모피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이 검은담비였고, 다음으로 검은 여우 그리고 일반 담비였다.

마르코 폴로는 암흑이라 불리는 지방, 즉 시베리아를 설명하면서 “이곳 주민들은 매우 진귀한 모피를 굉장히 많이 갖고 있다. 값비싼 담비 털을 갖고 있고, 흰 담비, 에르콜린, 다람쥐, 검은 여우 등도 많다. 그들은 모피 동물을 포획하는 사냥꾼들로서 놀라울 정도로 많이 수집한다”라고 기록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모피 수요가 급증했다. 신대륙으로부터 은이 유입되고 허세를 부리는 신흥 상인 계급이 발흥하면서다. 급성장하는 모피 시장의 주요 공급자는 러시아였지만, 러시아의 유럽 쪽 삼림에서는 모피의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검은담비의 시장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모피를 구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몰려갔고 19세기 북미의 골드러시 현상에 비견될 모피 열풍 현상이 나타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1945년 사할린의 한 모피 건조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동진해 알래스카에까지 이르렀다.  
ⓒ주강현 제공
1945년 사할린의 한 모피 건조실. 러시아는 모피를 찾아 동진해 알래스카에까지 이르렀다.
러시아인은 검은담비 사냥지가 새로 생길 때마다 재빨리 몰려가서 씨를 말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사냥지로 옮아갔다. 시베리아를 헤집고 다닌 사람들은 사냥꾼과 군인, 탐험가가 뒤섞인 잡종 인간들이었다. 러시아가 그렇게 빨리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된 배경은 이런 동물의 멸종 과정과 깊이 연관된다. 러시아 제국이 돈이 되는 모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페루와 멕시코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원주민을 강제 복속시키고 곧바로 돈이 되는 생산물들을 가져오도록 강제했다. 원주민에게 할당량을 강요하는 ‘야삭’은 검은담비나 기타 모피를 획득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었다. 야삭을 거두는 방식은 간단했다. 무장 부대가 마을 원로를 모아놓고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통보한다. 원주민이 모피 상납을 거부하거나 적게 내놓으면 천막에 불을 지르고, 순록을 빼앗고, 반항하면 죽이고, 부인과 아이는 포로로 잡아갔다. 훗날 무역 거래로 바뀌게 되었으나 러시아인은 값싼 항아리, 옥, 장신구 따위를 검은담비와 맞바꾸면서 사기를 치기 일쑤였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행사한 식민주의에 대해 원주민들을 고립 상태로부터 러시아 시장으로 끌어내어 수준 높은 러시아 문화의 혜택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주민 공동체가 단 하나의 상품(모피)에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원주민 스스로 자기들의 환경을 파괴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상품이 고갈될 무렵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길을 따라 모피 동물들의 비극이 이어진다

러시아 모피 회사는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모피를 팔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으로 배들을 보낸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노동이 금지될 때(1818년)까지 원주민을 동원해 대량 사냥에 나선다. 차르는 북아메리카에서의 모피 독점권을 개인 회사에 부여했다. 1799년부터 1820년까지 식민 통치에 준하는 모든 권한을 RAC(Russian America Company)에 부여했다. 모피 장사꾼에 의해 원주민은 전통적 물개잡이의 고유한 삶을 포기당한 채 강제 노동으로 내몰렸다.

원주민만 고통받은 것은 아니었다. 근시안적인 무차별 남획으로 시베리아에서 검은담비와 여타 모피 동물이 고갈되었다. 모피의 길은 대륙에서 열렸지만 최종적으로는 북빙양(북극해)과 태평양에서 마무리되었다. 지금은 알래스카 지역에서 모피 시장이 동계 스포츠와 함께 ‘모피 랑데부’라는 이름으로 열려 그 옛날 모피 무역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베링의 탐사는 베링 해협 건너 알류샨 열도에도 비극을 몰고 왔다. 바다표범이나 푸른 여우 같은 모피용 동물이 많다는 게 알려지자 시베리아에서 사냥개를 몰고 러시아 모피 장사꾼이 밀어닥쳤다. 이때부터 알류샨 열도가 알래스카와 더불어 미국에 팔릴 때까지 포유동물 수난 시대가 이어졌다(1741~1867).

정리하자면 ‘모피의 길’은 이렇게 이어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우랄 산맥을 넘어 바이칼 호 옆의 이르쿠츠크를 지나 레나 강가의 야쿠츠크 요새에 당도한다. 거기서 길이 갈려 남동쪽으로 하바롭스크에 당도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나 사할린 등으로 가는 노선이 있고, 유라시아 극동으로 향하는 노선은 오호츠크 해안의 오호츠크 요새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당도했다가 유라시아 극동인 추크치 땅을 통과해 베링 해협을 건넌 뒤 알래스카로 가서 알류샨 열도로 내려간다. 그 길을 따라 동물들의 비극이 이어진다. 북아메리카의 북방 개척과 서부 개척 역시 모피 동물과의 전쟁이었다. 유럽 이주민의 손에 들린 총에 의해 모피 동물이 멸절에 가까운 위기로 내몰렸다. ‘모피의 길’이 만들어낸 인간과 동물의 비극을 생각한다면, 과연 모피를 걸칠 생각이 들까.

반도라서일까, 한반도에는 국지적으로 담비가 일부 버티고 있다. 예로부터 한자로는 산달(山獺)·초(貂)·학(貉·貈·狢) 등으로 불리는 우리 담비 속에는 산달과 검은담비 2종이 있다. 고대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조선이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한반도의 담비들은 멸종하지 않고 호랑이와 표범 등이 사라진 숲과 들에서 최상위 서식자로 군림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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