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덕 벨리’에서는 괴상한 ‘혼담’이 오간다. 한쪽에서는 ‘결혼하자’고 자꾸 조르는데, 한쪽에서는 연방 ‘싫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더 기이한 점은 상대방이 몸서리치며 싫다는데도, 결혼을 원하는 쪽에서 자꾸 작신거린다는 점이다. 남녀 관계라면 이쯤에서 벌써 파혼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혼담은 지금까지도 시끌벅적 오가고, 어쩌면 결혼하자고 독촉하는 쪽에서 손사래 치는 쪽을 ‘꿀꺽’ 해버릴지도 모른다.

‘결혼 상대를 꿀꺽해버린다고?’라며 의아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점잖게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 결혼이나 혼담은 통합 혹은 흡수 합병을 뜻한다. 그리고 결혼을 요구하는 쪽은 KAIST을 말하고, 손사래 치는 상대는 생명공학연구원(KRIBB·생명연)을 의미한다. 문제는 두 기관의 통합 혹은 합병이 양쪽 연구자나 교수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추진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지난 40여 일 동안 두 기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교육과학기술부가 생명연과 KAIST의 통합을 밀어붙이면서 연구실에 있어야 할 과학자들이 점점 더 많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위).
통합을 둘러싼 두 기관의 갈등을 이해하려면 달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4월15일, KAIST 서남표 총장과 장순흥 부총장 등은 생명연의 이상기 원장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류와 협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 기관의 통합 문제를 슬그머니 거론한다. 그렇지만 이 원장은 통합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주로 교류 협력에 관해서만 발언한다. 문제는 다음 날 발생했다. 지역 신문에 난데없이 “과기원과 생명연이 통합을 추진한다”라는 기사가 뜬 것이다.

기사를 보고 놀란 생명연 노조(노조)는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라고 원장에게 물었다. 원장은 웃으며 “놀랐겠지만, 별거 아니다. 잘못 보도된 거다”라고 대답했다. KAIST 서남표 총장 측도 “우리도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노조는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책 연구소 통폐합 이야기가 나왔던 터라, 이후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연합뉴스KAIST 서남표 총장(위)은 “생명연이 반대하면 통합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지만, 행동은 다르다.
교과부, 마침내 ‘발톱’을 드러내다

그로부터 며칠 뒤 갑자기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차관이 생명연 연구부장과 KAIST 부총장 등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차관은 “두 기관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라”는 취지의 말을 건넸다. 그날 이후, 노조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리라 예견하고 전 직원 서명운동과 기자회견 등을 개최했다. “내부에서 너무 앞서나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만큼 사태가 좋지 않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다”라고 노조 오현우 조직투쟁팀장(선임연구원·곤충자원연구실)은 말했다.

5월7일, 노조 대표단은 미국에서 돌아온 KAIST 서남표 총장을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 서 총장은 “생명연이 원하지 않으면 통합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이튿날 생명원 이상기 원장이 면담했을 때도 서 총장은 “생명연이 원하지 않는 통합은 없다”라고 재확인했다. 그런데 이틀 뒤 생명연이 발칵 뒤집힐 만한 일이 일어났다. 노조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출연 기관에 대한 구조조정안〉이라는 문건을 입수했는데 내용이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문건에는 “생명연을 KAIST 직할 기관으로 통합하여…” “생명연의 재산을 국고 귀속 후 KAIST에 무상 양여하고…” “추진 일정:6월 통합안(MOU) 도출”이라는 문구도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노조가 적극 반발하지 않을 것이고, 반발하더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설득하면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누가 봐도 〈…구조조정안〉은 KAIST이 생명연을 흡수 통합하려 만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문과 추측만 무성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되자 생명연 구성원들은 더욱 반발했다. 즉시 생명연구통합반대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유장렬 선임연구부장)를 띄우고, 교과부 간부와 면담했다. 5월15일, 교과부 이걸우 학술정책연구실장은 “두 기관이 합의해서 추진하면 최대한 존중하겠다. 교과부는 구체적 계획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생명연 구성원은 거의 없었다. 

5월21일, 생명연 노조원 200여 명은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 전격 집결했다. 청와대와 교과부에 통합 반대 목소리를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교과부 노환진 과장(대학 연구기관지원정책관)은 생명연 노조 투쟁위원회 이성우 집행위원장(책임연구원·약학)에게 전화를 걸어 ‘상경 투쟁을 늦추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정부는 아직 안이 없다. 두 기관이 안을 제출하면 그걸 검토해서 조율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또 다른 교과부 간부가 마침내 숨겼던 ‘발톱’을 드러냈다. 출입 기자단 간담회에서 “KAIST-생명연 통합이 바람직하다”라고 공개 표명한 것이다. “그 말로 정부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이성우 집행위원장은 돌이켰다.

연간 예산 1100억원, 박사 연구원 202명이 일하는 연구원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KAIST가 만든 통합 계획서는 달랑 1장뿐이었다. 그러자 교과부는 서둘러 그 안을 보완한 계획서를 제출했다. 반면, 생명연의 협력 계획서는 15장이나 되었다.

기막힌 KAIST의 ‘통합 계획서’

더 기막힌 일은 5월23일 교과부 차관 주재로 열린 ‘3차 협의’에서 벌어졌다. 이날 생명연과 KAIST은 각각 ‘교류 협력과 통합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KAIST 계획서가 이상야릇했다. 23년간 국내 생명공학 연구의 중심축 구실을 하고, 1100여 명의 직원(박사 200여 명 포함)이 일하는 대형 정부 출연 연구소와 합병하겠다고 내민 계획서가 표지도 없이 달랑 A4 용지 한 장뿐이었던 것이다(60쪽 사진 참조). ‘생명연-KAIST 통합 발전 방안’이라 이름 붙은 계획서는 내용도 부실했다.  

“목표:세계적인 생명공학 연구 교육 집단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생명연과 KAIST을 통합 운영한다. 통합 후 명칭:KAIST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생명연구원장 임명:부총장급으로 총장이 임명하되, 연구원의 운영을 책임진다. 연구원직과 교수직은 상호 겸직 가능하고, 겸직 시에는 해당 인사 규정(연구원직과 교수직)에 따름. 생명연 소속 연구원과 직원의 고용은 승계되고, 통합과 동시에 사학연금에 가입함….”

통합만 바라고 만든 계획서여서일까. 어디에도 ‘협력’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반면 생명연의 계획서는 표지를 포함해 15쪽이었는데, 내용도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 국가 바이오에서 생명연의 위상, 생명연-과기원 학연 연계 방향’  등 비교적 정교했다. 특히 강조한 내용은 생명연과 과기원 간에 ‘바이오 메디컬 융합 연구센터(가칭)’를 설립하자는 제안이었다. 생명연의 한 책임기술원은 “이 센터만 설립되어도 두 기관의 통합에 버금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교과부가 보기에도 KAIST이 내놓은 계획서가 부실했던 것일까. 교과부는 느닷없이 〈KAIST-생명연의 ‘학·연 협력 우수 모델’의 설정 계획서〉라는 문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표지 아래에 적힌 글 몇 구절이었다. 거기에는 “본 案은 함께 제시되는 KAIST의 案이 다소 간단히 표현되어 있어 이 案을 참고로 좀더 구체적 모습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라고 쓰여 있었다. 통합에 대해서 늘 ‘두 기관이 해결할 문제’ ‘두 기관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던 교과부가 난데없이 KAIST의 ‘대리인’ 노릇을 자임한 셈이다. 아니, 스스로 이번 통합을 주도하고 있음을 드러낸 셈이었다.

노조 투쟁위원회에 따르면, KAIST은 줄곧 자신들의 (통합) 안이 없다고 말해왔다. 그러다가 막판에 한 장짜리 안을 냈고, 그것을 문제 삼자 이번에는 ‘교과부에 충분히 설명해서 자세히 안을 만들지 않았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교과부 관계자들도 5월22일 저녁까지 “KAIST 안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교과부가 부실한 KAIST 안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밀었으니, 생명연이 보기에 황당할밖에….

ⓒ연합뉴스‘통합 반대’를 선언한 생명연 이상기 원장.
노조 투쟁위원회는 KAIST과 교과부의 이같은 아리송한 태도에, 배후가 있다고 의심한다. 바로 청와대 김창경 과학비서관이다. 확인 결과 김창경 비서관은 서남표 총장의 MIT 후배이자 제자였다. 그렇지만 김창경 비서관은 두 기관의 통합과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시사IN〉과의 전화 통화해서 “어제 기자 간담회에서 모두 다 말했다”라고 말했다. 5월28일 낮, 그는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과학 담당 기자들과 오찬을 하면서 “(두 기관의 통합에) 청와대의 간섭은 없었다”라며 개입설을 부인했다. 서남표 총장과 줄곧 두 기관의 통합을 추진해온 KAIST 장순흥 부총장도 마찬가지였다. “서남표 총장의 상대는 대통령이다. 그런 분이 비서관에게 무슨 일을 부탁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청와대 개입설을 적극 부인했다(오른쪽 딸린 기사 참조).

그렇다면 상황이 더욱 복잡하고 이상하다. 생명연의 이상기 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통합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생명연 노조는 물론 연구원 대다수도 통합에 반대하는데 누가 왜 계속 통합을 추진하는 것일까. 노조 투쟁위원회는 그 배후에 청와대가 있고, 통합 업무를 교과부가 지휘하기 때문에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진다고 판단한다. 교과부 이걸우 학술연구정책실장은 ‘통합 지휘설’을 부인했다. “두 기관의 입장 차가 커서 조정한 적은 있지만, 우리가 나서서 추진한 적은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KAIST 교수협의회도 ‘일방 통합’ 반대

일부 노조원은 서남표 총장이 과학기술부가 교육부와 통폐합되면서 수백억원의 연구 지원비가 끊기자, 그 예산을 충당하고  KAIST의 몸집을 불리려 통합을 추진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고 이성우 집행위원장은 말했다. “KAIST와 ICU(한국정보통신대학원 대학교)를 통합하는 데도 1년6개월이 걸렸다. 비교적 자그마한 학교랑 통합하는 데도 이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왜 생명연은 불과 두세 달 만에 서둘러 통합시키려 하는지 모르겠다.”

KAIST 노조조차 이같은 의견에 동조한다. KAIST 노조 김세동 위원장은 “서 총장은 두 기관을 자율적으로 통합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통합안을 만들어 교직원의 의견을 수렴한 뒤 추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총장 개인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라고 말했다. KAIST 교수협의회의 견해도 비슷하다. 김종득 교수협의회 회장은 통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즉답을 피한 채, 교수협의회 회보(5월30일자) 사설을 참조하라고 말했다.

사설은 이번 통합이 ‘논의 없이 진행되어 문제’라고 지적한 뒤 “통합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이 무언인지 제시하지 못했다”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이번 통합이 “국가 생명과학 연구의 축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통합 이후 필연적으로 다른 대학과 연구 갈등 구조를 빚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생명과학의 인력 수급에 불균형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 특히 이런 문제들을 검토 한번 안하고 단지 대학-연구소 통합이라는 건수 올리기 식이라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만약, 통합이 성사되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까? 생명연 대다수 연구원들은 회의적이다. 잘 나가던 국책 연구기관만 해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 1980년대에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은 KAIST과 KIST를 전격 통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딸린 기사 참조). “당시에는 비슷한 연구기관이 합쳐 다시 분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명연과 KAIST를 합치면 영영 되돌릴 수 없다”라고 이상철 연구정책부장은 말했다. 

그렇다고 생명연의 구성원들이 시대 변화에 따른 정부 출연연구소의 역할 변화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구성원의 의견 수렴도 거치지 않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하듯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통합이나 변화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 정책에 별말 없이 따랐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과학자 한 명은 “연구실에 있어야 할 연구원이 거리에 나가면 우리도, 국가도 큰 손해다. 정부는 통합 추진을 멈추고 새로운 변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통합 논의는 5월27일 생명연 유장렬 선임연구부장이 “통합을 전제로 한 논의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고 선언한 뒤 중단된 상태다. 교과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기자명 대덕·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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