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지난 10월6일 경찰의 압수수색을 저지하는 정동영 후보 캠프 사람들.
게임은 싱겁게 끝나는 듯했다. 9월29일과 30일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광주·전남에 이어 부산·경남 지역 경선에서 1위를 하자 대세론이 일었다. 범여권 후보 가운데 1위를 달리던 손학규 후보의 지지율은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수위를 차지한 정 후보는 지지율 격차를 벌려나갔다. 손학규·이해찬 후보의 거품이 빠지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문국현 후보의 지지율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판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풍이었다. ‘신정아 게이트’와 남북 정상회담에 치인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은 감동도, 흥미도, 이변도 없이 반환점을 돌았다. 흥행 참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은 경찰이었다. 10월 초 경찰은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선거인단에 노무현 대통령의 명의를 도용한 배후 인물이 정동영 후보 지지자인 서울 종로구 구의원 정인훈씨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신당 경선 구도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울고 싶은 놈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이해찬·손학규 후보 진영은 논평을 퍼부으며 경찰을 압박했다. 특히 이 후보 측의 공세가 매서웠다. 이 후보는 “불법적 후보가 승리하면 우리 진영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대선도 참패하고 (내년)총선도 참패하며 당도 몰락하고 한국 민주주의에 위기가 오게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0월6일 서울경찰청은 여의도에 있는 정 후보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가장 유력한 여당 대선 후보의 사무실을 경찰이 뒤지겠다는 것은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경찰청 한 간부는 “매일 국회의원들이 서울청과 본청에 몰려와 데모하고 항의 전화를 하고 있다. 시간을 늦추면 정치적으로 휘말릴 소지가 있어 수사를 조기에 끝내려고 압수수색에 나섰다”라고 말했다. 캠프 관계자들의 저지로 압수수색은 무산됐지만 유권자에게 명의도용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애초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을 선거인단에 올렸다며 단순 흥행용 해프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던 터였다.

돌발 변수는 단숨에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변을 만들었다. 10월9일 3만명을 대상으로 한 1차 모바일 투표에서 손 후보는 1위를 차지했다. 정 후보와의 표 차이는 645표. 고작 3.0% 격차였지만 그 의미는 컸다. 그때까지 손 후보는 8개 권역 현장투표에서 단 한 곳도 승리하지 못했다. 정 후보의 조직적 연타에 다운을 당해 심판이 ‘나인’을 카운트한 시점에서 손 후보는 기사회생했다. 모바일 투표는 단숨에 흥행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2차 모바일 투표를 코앞에 두고 변수가 생겼다. 다시 경찰에 의해서다. 10월10일 영등포경찰서는 정 후보 지지 모임인 ‘평화경제포럼’과 신용인증 업체 ‘크레딧뱅크’를 압수수색했다. 영등포경찰서 수사 관계자는 “평화경제포럼이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 선거인단에 등록하면서 크레딧뱅크의 인증을 받았다는 이해찬 후보 측의 수사 의뢰에 따른 것이다. 전주에 있는 한 병원의 환자 기록이 통째로 정 후보 측에 넘어갔다는 의혹도 함께 조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영등포경찰서는 이날 압수수색이 서울경찰청의 수사와는 별개라고 밝혔다.

ⓒ뉴시스지난 8월 검찰의 수사 발표에 항의해 밤샘 농성에 나선 이명박 후보 지지자들.
경선의 중대 분기점에서 정 후보 측에 대한 전 방위 수사가 진행되자, 정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한 ‘청부 수사’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손 후보나 이 후보 측에서도 이재정 통일부 장관과 차의환 청와대 혁신수석 명의를 도용했다. 유독 정 후보만 수사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 후보와 손 후보가 밀약을 맺고 정 후보를 죽이려 하고 있다. 승부처에서 경찰이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것은 용산고 동문인 이해찬-이택순 경찰청장 라인이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정동영 후보는 “경선이 끝난 후에라도 압수수색의 배후를 밝히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경찰청 한 간부는 “고발장이 접수돼 수사에 나선 것이지 위에서 누가 시킨다고 움직일 수 있는 수사가 아니다. 다만 수사 시기와 성격 때문에 오해받고 있고, 오해받을 만도 하다”라고 말했다. 다른 서울경찰청 고위 간부는 “우리가 수사하고 싶어서 하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1일 모바일 2차 투표에서 손 후보는 정 후보와의 격차를 3.8%포인트로 벌리며 1위를 차지했다. 후보 선출을 이틀 앞둔 10월12일, 서울경찰청은 노 대통령 명의도용 문제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제 수사는 검찰 몫으로 넘겨졌다.

이번 대선에서는 검찰·경찰·국세청 등 이른바 권력기관이 중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까지 선거 관련 수사와 재판은 선거 이후로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후보 관련 의혹이나 소송이 제기될 경우, 검찰과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고 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오해에 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지난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가장 큰 변수는 경선 투표를 일주일 앞두고 발표된 ‘도곡동 땅’ 관련 검찰 수사 결과였다.

대선판에 미칠 권력기관의 파장에 각 캠프는 대비책을 세웠다. 우선 후보들이 탄압받는 이미지를 부각하고, 정권 혹은 이명박 후보 인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공작한 것이라는 논평을 쏟아낸다. 검찰청과 경찰청을 항의 방문하거나 철야 농성을 해서 혼을 뺀 다음, 의혹의 진위보다 출처를 문제 삼는다는 공식을 세웠다. 하지만 칼자루는 권력 기관이 쥐고 있다는 게 부담 가는 대목이다.

전투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이자 많은 의혹이 제기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진영에서 벌어질 공산이 크다. 도곡동 땅의 실소유자가 제3의 인물이라는 검찰의 아리송한 발표는 본선에서 다시 쟁점이 될 게 분명하다. 또한 BBK 사기 사건의 핵심 인물 김경준씨의 도피로 기소중지 결정을 내렸던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송환에 대비해 수사 자료를 재검토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의 재산관리인으로 의심받는 김재정씨와의 재산 관계, AIG 국부유출 논란, 군 면제 의혹 등 이 후보 캠프의 의원들이 검찰에 갈 일이 수두룩하다.

이명박 후보와 친·인척의 투기 의혹에 대한 국세청의 조사 내용도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전군표 국세청장은 한나라당 이 후보와 친·인척에 대해 79건의 재산 내역을 조회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국세청 관계자는 “이 후보와 친·인척의 재산 규모가 워낙 커서 특별조사 때마다 스크린되다 보니 79차례나 조회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이 나오면 대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