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2일 전남 광주. 정체불명의 남자 10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끌려간 곳은 안기부 지하 취조실이었다. ‘미란다 원칙’은 교과서에서조차 어색한 시절이었다. 취조실에 들어서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조사관들이 말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잡혀 왔으니,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죽여버려도 아무 문제없다. 많은 놈들이 남산에서 죽어 나갔지만 아무 일 없었다. 자, 봐라! 이 벽의 핏자국이 여기 온 놈들이 고문받고 남긴 자국이다. 순순히 불어라.”

ⓒ시사IN 한향란1980년대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양동화씨의 최근 모습.

영문을 몰라 대답을 못하자 무차별 구타가 가해졌다. 65일 동안 계속된 고문 결과 양동화씨는 간첩이 되고 말았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은 저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했다. 간첩 행위의 증거는 오로지 자백뿐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진짜 간첩이 된 것처럼 여겨졌다. 죽기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석방 뒤에 사회공동체 봉사활동 나서

양씨는 자신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운동을 했노라고 자백했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형식적인 재판이 이어지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이었다.  사형선고가 그냥 엄포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시민의 저항으로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루 24시간 내내 수갑을 차고 생활하는 사형수에게는 집행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내내 죽음과도 같았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직후인 1988년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양동화씨가 동료와 함께 석방된 것은 10년 뒤인 1998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그는 석방 직후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현재 디지털 콘텐츠 회사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극심한 한계상황을 경험하면서 내면의 깊이가 깊어진 까닭일까. 그는 차분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진지했다. 1986년 ‘서진룸싸롱 살인 사건’의 주범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아무리 흉악범이어도 22년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가혹하다며 그를 구명할 방법을 찾아달라는 이야기부터, 오랜 군사독재에 사이클론까지 겹쳐 극심한 고통을 겪는 버마 어린이를 도와야 한다는 것까지. 쉼없이 ‘타인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최근 들어 우리의 자유가 조금씩 뒷걸음치는 형편이지만, 그나마 이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살게 된 것도 모두 험한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 했던 양씨 같은 이의 덕분이다. 구미유학생 사건의 김성만·양동화·황대권·강용주·사노맹 사건의 박노해·백태웅 등 국가가 사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던 그 험한 시절이 끝나고 장기 복역 양심수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되었다.

양씨가 잡혀갈 때 〈보도특집-학원에 뻗친 붉은 손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MBC는 2001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양동화씨의 사연을 다뤘다. 이처럼 언론의 참회가 있었지만, 그를 망가뜨린 국가는 참회는커녕 그 흔한 유감 표명조차 없다. 민주화운동 보상이나 명예회복을 해주기는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사회 곳곳에서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멈추지 않는다. 국가가 그들에게 떠안긴 고통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커다란 빚을 졌다. 그런데 그들은 석방 이후에도 실천과 나눔으로 우리에게 또 많은 빚을 안긴다.  아, 이 많은 빚을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하나.

기자명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