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이야기가 이종교배한 〈ZOO〉

이다혜 (〈판타스틱〉 기자)

 
‘라이트 노블’은 다양한 문화 간 이종교배의 산물이다. 명칭 그대로 소설은 소설인데 SF, 추리, 공포, 코미디, 판타지 같은 장르문학부터 아예 매체가 다른 애니메이션과의 교차점도 분명히 보인다.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처럼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가볍게 잘 읽히는’ 소설이 바로 라이트 노블인 것이다. 라이트 노블이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보다 ‘잘 읽힌다’는 점 때문이다. 라이트 노블 작가 중 오쓰이치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조합에 능한 작가로, 라이트 노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까지 폭넓게 끌어안는다.

〈ZOO〉와 출간을 앞둔 〈GOTH〉는 ‘천재적’이라는 수사가 붙은 오쓰이치의 색깔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책이다. 〈ZOO〉는 단편집으로, 열 편이 수록되어 있다. 무엇을 기대해도, 뜻밖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공포부터 블랙 코미디,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와 접점을 갖는 작품들인데 각 장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불러일으킨다.

가장 충격이 강한 작품은 첫 단편 〈Seven Rooms〉. 영화 〈큐브〉를 연상시키는 좁은 공간에 이유 없이 갇힌 여자들과 한 소년의 이야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건의 원인 규명도, 범인을 밝히는 것도, 극적 사건 해결의 만족감도 아니다. 그저 막막한 공포의 매 순간을 눈앞에 뚜렷하게 그려 보인다. 〈신의 말〉은 말하는 것을 현실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다. 소녀는 말만 하면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일까지도 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만개하게 하는 것은 소녀 안의 어둠이다. 소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ZOO〉에 실린 단편들은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그 역시 이미지 중심의 짧고 기이한 이야기들에 잘 어울린다. 어딘가에 숨어서 열쇠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며 상상 혹은 망상에 빠지는 듯한 기묘한 기분을 매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 나를 둘러싼 세계의 죽음이라는 명제가 거의 모든 작품들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다. ‘가벼운’ 소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이곳 너머’의 풍경을, 오쓰이치는 급진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

‘어떻게’보다 ‘왜’에 집중한 〈용의자 X의 헌신〉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용의자 X의 헌신〉은 처음부터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돈을 갈취하는 전남편과 싸우던 야스코는 딸을 보호하려다 우발적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어쩔 줄 모르는 모녀에게 옆집에 사는 남자가 찾아온다.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러 고교 교사로 일하는 이시가미는 야스코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이시가미는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발휘해 모녀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대체 그가 만들어낸 알리바이는 어떤 것일까.

추리소설은 범인이 만들어낸 트릭을 깨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장르다. 〈용의자 X의 헌신〉 역시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시가미가 만들어낸 알리바이의 트릭이 무엇일까, 계속 머리를 굴리게 된다. 남편의 시체가 발견되자 모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경찰은 이시가미가 만들어낸 알리바이를 절대로 깨지 못한다. 결국 경찰은 이시가미의 대학 동기인 물리학자 유가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알리바이 깨기라는 전통적인 추리 게임을 전개하는 동시에 천재적인 범인과 그에 필적하는 탐정이라는 흥미로운 대결 구도를 그리며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용의자 X의 헌신〉은 단지 트릭을 푸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트릭이 풀리는 순간, 아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시가미의 진짜 트릭이 밝혀진다. 그것은 이미 제목에서도 명백하게 밝힌 ‘헌신’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면서 만들어낸 완벽한 트릭. 수학적으로는 완벽했던 그 트릭이 무너지는 이유는,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떻게’보다 ‘왜’에 더욱 집착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작가다. 추리소설에서의 범죄는 단지 그 범죄의 기이함이나 현란함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범죄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기 위함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그런 추리소설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재미와 완성도 검증된 〈한국공포문학단편선 2〉

이종호 (공포문학 작가모임 〈매드클럽〉 회장)

 
국내 공포문학의 태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PC통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4대 PC통신사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게시판은 공포문학 게시판이었고, 인기 있는 이용자의 글은 즉시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공포소설이라는 장르적 타이틀을 걸고 출간된 거의 모든 소설이 괴담이나 무서운 이야기 수준에 그쳤던 것도 이런 태생적 이유 때문이고, 독자들 또한 공포소설은 온라인에서 공짜로 읽는 저급한 글이라는 왜곡된 선입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1편은 일정 수준의 문학적 완성도를 지닌 공포 단편들이 수록된 국내 작가들의 첫 번째 작품집으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19세 미만 판매금지 도서로 선정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출간 1년 만에 4쇄 5천 부를 찍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1편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공포라는 장르적 코드에 충실한 작품집이었다면 1년여 만에 출간된 〈한국공포문학단편선 두 번째 방문〉은 전편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가 높아졌고 잔혹함보다는 대부분의 작품이 심리 공포에 치중함으로써 장르와 대중 사이의 괴리감을 많이 좁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과 참여 작가들은 현재 소설 시장보다 충무로 영화 시장에서 먼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데 1편에 수록된 박동식의 단편 〈모텔 탈출기〉가 영화로 제작되고 다른 단편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영화사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단편선에 참여한 김종일 작가는 황금드래곤 문학상 당선작인 〈몸〉을 비롯해 출간 예정작인 〈악령〉과 〈손톱〉 등을, 필자는 이미 영화화된 〈분신사바〉를 비롯해 〈이프〉와 〈붉은 기와집〉 등을 잇달아 영화화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공포소설이 비록 이제야 독자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단계이지만 소설의 재미와 완성도에서만은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두 번째 방문〉은 국내 공포문학의 현재 수준을 한눈에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가들이 선보이는 진정한 한국적 공포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집이다. ?

따뜻한 사회파 미스터리 〈화차〉

임지호 (북스피어 편집장)

 
미야베 미유키는 언제나 ‘시타마치(下町)’의 정서를 대변해왔다. 시타마치란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하는 말이다. 화려한 번화가의 삶에서 떨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을 지켜나가는 곳.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의 데뷔 단편 제목(〈우리 이웃의 범죄〉)처럼 가까이에 있어 손에 잡힐 듯한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왔다. 그가 작품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목적인 범죄나 트릭의 해결 또는 범인의 체포가 아니라, ‘왜, 어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종종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불린다.

그가 쓴 미스터리 중에서 〈화차〉는 스타일이 완성된 대표작이자 모든 원형이 녹아든 작품이다. 개인 파산과 신용 불량을 주제로 형사의 뒤를 쫓는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를 그대로 겹쳐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을 만큼 설득력이 강한 작품이다. 〈화차〉가 발표된 것은 1990년대 초, 거품경제가 붕괴된 특수한 시기인데도 이제껏 작품의 아우라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화차〉에서 보이는 색깔이 그저 사회 비판과 살아가는 이야기에만 머물렀다면 이만큼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힘은 세심한 짜임새와 이야기를 다루는 필력에 있다. 그는 호흡을 적절하게 조절할 줄 아는 작가다. 호기심을 끌었다가 말았다가, 극적 미스터리 효과를 보였다가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독자가 쉽게 동화할 만큼 인물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보이는 조각들은 결국엔 낭비되는 법 없이 모두 하나로 엮인다. 한 올 한 올이 잘 짜인 태피스트리(tapestry) 같다.

이 모든 훌륭함에도, ‘미야베 여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온갖 비정하고 사나운 도시의 황량함 속에서도 여사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무책임하고 무작정한 따뜻함이 아닌 온갖 고민과 갈등을 품에 껴안은 따뜻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펜 끝에 그려지는 사회가 아무리 어둡고 메말라 보일지언정 위로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다시 집어들 수밖에 없다. ?

‘뉴웨이브 SF’의 선구자 로저 젤라즈니의 힘

박상준 (〈판타스틱〉 편집주간)

 
로저 젤라즈니는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폴란드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드라마’를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며 틈틈이 SF를 쓰다가 32세 때인 1969년 전업작가로 나섰다. 프로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였다. 그는 권위 있는 양대 영어권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각각 6회, 3회 수상하는 등 명실상부하게 미국의 대표적인 SF·판타지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군림했다.

신화학, 신학,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영국·미국·프랑스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탐정소설도 탐독했던 그는 1960년대 영·미권 SF계에 휘몰아친 ‘뉴웨이브’의 선도자 중 하나였다. 뉴웨이브 SF란 과학기술을 중시하던 기존의 흐름에 반해 인간의 내면세계나 형이상학적·초현실적 테마에 비중을 둔 일종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SF의 외연을 넓히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한국에 젤라즈니가 소개되면서 붙었던 ‘인문학적 SF’라는 딱지가 그의 스타일을 대변해준다. 그는 그리스, 인도, 이집트 등의 고대 신화들을 재해석해 SF나 판타지로 버무려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1993년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신들의 사회〉 (Lord of Light)는 한국의 SF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젤라즈니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1967년에 처음으로 출간된 이 책은 그동안 소개되었던 SF와는 달리 과학기술적 묘사를 거의 배제한 채 힌두 신화에 바탕을 둔 섬세하고 복잡한 스토리와 구성으로 ‘지적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뒤에 나온 로저 젤라즈니의 판타지 대표작인 〈앰버 연대기〉 시리즈도 많은 SF·판타지 팬들을 사로잡았다. 이 두 작품을 기획·번역한 김상훈씨는 그 밖에도 〈내 이름은 콘라드〉 〈변화의 땅〉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등 다수의 젤라즈니 작품들을 소개해 원작가와 번역가가 둘 다 장르문학 팬들에게 인기를 얻는 모범 사례가 되었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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