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어린이집에서 놀이가 살아나고 아이들이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장과 원장이 아이들과 교사를 놓아주어야 아이들의 배움터와 놀이터가 활기차게 바뀐다. 아이들이 다닐 만한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를 만들고 싶다면 모름지기 교사를 활기차게 지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책 읽기와 글쓰기도 때로는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뭔가를 가르치려고 아이들 뒷덜미를 잡고 못 움직이게 하면서 아이들이 놀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금 우리 어른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이들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짐작하건대 아이들을 책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다. 제대로 놀려면 놀이하는 방법과 차례가 적힌 책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현재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런 책을 몇 권 썼지만 이러한 책들이 아이들과 놀고 느끼고 나누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됨을 훗날 알았다. 마치 이런 책들은 놀이를 책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미신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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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마침내 놀이마저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는 놀이보다 중요한 것이 참 많다. 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놀이는 강을 건너면 뒤에 두고 가는 배와 같다. 놀이를 위해 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하냐고 되물을 수 있다.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오래도록 놀다 보면 생기고 쌓이고 오가는 따뜻한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사랑은 말로 마음에 새기기 어렵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와 부모와 아이들은 또 그들대로 놀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부대껴야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있다. 무슨 놀이를 하든 관계없다. 민속놀이나 전래놀이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을 놀이로 여기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그것이 놀이다. 이렇듯 놀이를 하는 시간이 바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으로 자리 잡아가야 한다. 또한 놀이와 유희나 오락이나 게임을 같은 것으로 아는 오해도 바로잡아야 한다.

아이들은 놀면서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음도 깨우친다. 가까이 있는 동무가 나와 생각이나 몸짓이 다를 수 있음을 배워서가 아니라 놀면서 깨우친다. 놀다 보면 다르니까 서로 맞추어보면서 자기 고집도 돌아보고 가진 것도 나눈다. 잘 알듯이 놀이 속에는 다툼을 중재해줄 어떤 절대적인 권위자가 없다. 운동경기처럼 심판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사와 부모가 심판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놀이를 깨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늘 경계해야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끼워줄 때까지 가까이에서 잠자코 오래도록 기다려야 한다.

이렇듯 나와 여러 가지로 다른 처지에 놓인 친구와 놀다 보면 놀이판 속에서 어른들은 다 듣지 못하지만, 이런저런 수많은 이야기를 아이들끼리 서로 주고받는다. 놀이 속에서 온갖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자라고 세상을 배운다. 그런데 놀이를 학습의 효과를 높이는 보조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분명히 말하지만, 놀이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물건 팔려고 하는 사기꾼이거나 장사꾼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놀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관계와 관심과 사랑과 우정이 빠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오락과 놀음으로 떨어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기자명 편해문 (어린이놀이 운동가·〈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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