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와 슬그머니 도망가곤 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 가을은 축복이었다. 수확의 계절답게 온갖 곡식과 과일을 얻고 나면 1년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처럼 아름다운 단풍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래서인지 본격적인 가을은 신기하게도 음력 팔월 보름, 한가위가 지나면 시작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기후는 점점 아열대 기후로 변해 봄·가을이 너무나 짧아졌다. 기후 환경의 변화로 단풍이 예전만큼 곱지 못하다는 소식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을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노동 후의 휴식만큼이나 달콤한 ‘단풍놀이’ 때문이다.

단풍놀이는 봄날의 꽃구경처럼 짧게 지나가기에 미리미리 알아두고 준비하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단풍은 대체로 10월 말에 절정을 이룬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0월 넷째 주를 기준으로 잡아 여행 계획을 세운다면 단풍놀이에 큰 지장은 없다. 좀 이른 시기라면 녹색에서 붉고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자연의 섭리를 볼 수 있을 테고, 좀 늦은 시기라면 절정 후에 쇠락해가는 단풍의 쓸쓸함을 볼 수 있어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가을비가 내린 6일 오후 단풍이 물든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쓴 채 걸어가고 있다. 2013.11.6
ⓒ연합뉴스 가을비가 내린 6일 오후 단풍이 물든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시민들이 우산을 쓴 채 걸어가고 있다. 2013.11.6
아이와 가는 단풍 구경은 사계절 여행 중 꼭 해봐야 할 여행이라는 것도 생각하자. 몇 년 전이었다. 김천으로 떠난 단풍 여행 때 우리 아들은 직지사 경내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핏빛처럼 붉디붉은 단풍잎을 집어 들고는 나에게 달려와 “엄마, 신기해요. 단풍잎이 꼭 내 손 같아요. 귀여워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연방 나뭇잎은 왜 계절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지, 꽃은 왜 지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면서 앙상한 나무를 보고 아들은 다시 “엄마, 나무는 춥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저번에 본 그 빨간 단풍잎이 떨어지면 이렇게 나뭇가지만 남는 거예요? 그럼, 봄이 되면 다시 잎이 나고 꽃이 피고?”라고 말하며 가르쳐주지도 않았던 자연의 이치를 술술 혼자서 풀이하기 시작했다.

순간 내겐 큰 울림이 있었다. 평소 학원도 거의 보내지 않고 맘껏 뛰놀며 가족 여행을 다니는 것을 가장 큰 공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불안했는데 여행과 함께 훌쩍 자란 아이를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 되고 뿌듯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단풍 여행지들은 많다. 하지만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특별히 유명한 곳을 찾지 않더라도 단풍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서울에 있는 궁궐의 정원에는 오래된 수령을 지닌 나무들이 많아 단풍이 아름답다. 어느 해 가을에 보았던 경복궁 향원정의 단풍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또한 전국 대부분의 사찰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어 웬만하면 단풍을 볼 수 있다. 산사로 가는 길,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며, 나뭇잎을 밟으며 가을을 느끼면 삶의 행복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국에 산재한 수목원이나 휴양림을 찾는 것도 좋다. 봄날의 꽃이 만발했던 곳에는 으레 가을날의 단풍이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에서의 단풍놀이 후 숲속에서의 하룻밤은 그 자체로 삶의 힐링이 된다. 인기 있는 여행지라면 테마 여행사의 버스 여행이나 기차 여행을 이용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늘 가족을 위해 애쓰는 아빠들에게도 운전대를 놓고 창밖 가을 풍경을 만끽할 시간은 필요하다.

올가을이 가기 전에 아이와 함께 단풍놀이를 떠나보자. 우리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예쁜 단풍잎을 찾아 책갈피에 끼우고 말려 좋은 글귀도 적으며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남기자. 가을의 단풍은 우리의 젊음처럼 그리 길지 않다.

기자명 장은숙 (부산사대부고 국어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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