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이런저런 장애 꼬리표가 아이들에게 남발된다. 놀 수 없고 움직이지 못해 고통받는 아이들의 답답한 마음은 보지 않고 드러난 행동만을 따지는 데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상술 그리고 부모와 교사들의 ADHD에 대한 몰이해로 아이들이 멍들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같은 말하기·듣기·읽기·쓰기·셈·학습·감각·운동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주의 산만’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찾기 어렵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인 상태라는 걸 부정하는 것은 죄짓는 일이다. 특히 남자 아이들은 이해받지 못해 오갈 곳이 없다.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인다, 소리 지른다, 운다, 마구 뛰어다닌다. 또는 생기 없이 무기력하다. 지금 초등학교 교실의 한 모습이다. 마구 뛰는 아이와 기운 없는 아이는 사실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유를 원한다. 교육은, 마구 뛰거나 힘없는 아이들 사이에 있어야 할 명랑한 아이를 다 집어삼킨다. 이렇게 속으로 꼭꼭 눌러놓았던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꺼내면 그 아이는 주의가 산만하다는 소리를 듣고 환자가 되고 약을 먹는다. 그렇지만 이 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한낱 각성제일 뿐이다. 부작용도 크다. 그렇다면 치료제도 아니고 부작용도 큰 이런 약을 왜 아이에게 오래도록 먹여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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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백승기

분명한 것은 아이들도 살려고 산만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려니 죽을 것 같아 마구 돌아다니고 던지고 욕하는 거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걸까. 주의력은 무언가에 흠뻑 빠져 놀아야 생긴다. 다시 말해 아이가 주의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마음껏 놀지 못한 하나의 증거다. 아이들에게 진정 결핍된 것은 주의력이 아니라 놀이다. 왜 다 큰 아이들이 교실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지 바로 보자. 오로지 할 일이라고는 마음껏 뛰어노는 일밖에 없었던 아이들로부터 놀이를 빼앗고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문 앞에서부터 빼돌려 건물 안에 가두는 일을 도대체 몇 년씩이나 우리가 깊이 공모했는지 말이다.

아이들이 지금 무엇인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처방에 나서기보다는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마음껏 놀면서 지냈는지 내력을 살펴야 부모다. 내가 아이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놀이 결핍이 주의 집중 부족과 매우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고통받는 아이의 살아온 내력을 살펴볼 때 가장 크게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은 지나간 놀이와 자유이다. 쉽지 않은 일임을 나도 안다. 놀 동무와 놀 틈과 놀 터가 허락되어도 쉽게 놀이에 끼지 못해 힘겨워하는 아이가 있으며, 지나친 충동으로 동무들이 피하기만 해 놀이 속에서 온통 상처뿐인 아이도 분명 있다. 그래도 놀아야 한다. 놀이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놀면 아이들은 치료받을 일이 없다.

아이들의 문제는 놀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부모는 아이들이 평생 쓸 몸과 마음을 가꿔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모두 다 뇌에 마음을 빼앗겨 머리가 좋아진다면 뭐든지 한다. 그런 어른들을 볼 때 나는 소름이 돋는다. 왜들 모를까. 샅샅이 파헤치고 알아내고 개발하려는 아이들 뇌가 아이들 몸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야 뇌 또한 튼실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약을 먹고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들이 주의가 산만하다며 약을 먹이는 우리 어른인 것 같다.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은 주의력이 아니라 놀이다.

기자명 편해문 (어린이놀이운동가·〈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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