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만나는 아이들 가운데 웃음이 좋은 아이들이 있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아이는 울 만큼 울어본 아이로구나!’ 거꾸로 웃음이 적고 그늘이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쪽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저 아이는 마음껏 울어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열 살 안팎의 시기에 울 만큼 운 아이가 활짝 웃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아이들 눈물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달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10년을 아이들이 울고 싶을 때 울도록 지켜보는 게 부모다.

우리 집 아이도 천장이 날아가라고 악을 쓰며 울던 때가 있었다. 아빠가 아이들 동네를 왔다 갔다 한 지 여러 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왜 우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이라는 존재가 울고 싶어서 운다. 이렇게 아이가 자기 전 존재를 걸고 우는데 부모와 교사의 반응이 참 한심할 때가 많다.

뭘 안 사주고 안 해줘서 우냐? 아파트 시끄러운데 왜 우냐? 뭐 잘한 게 있다고 우냐? 울면 아파트가 울려 시끄러우니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치기에 앞서 아이 손을 잡고 ‘엄마 아빠가 이런 데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이 손을 잡고 공터와 큰 거리로 나가 아이가 마음껏 소리 지르고 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부모다.

아이들은 소리 질러야 큰다. 목청이 터지도록 말이다. 뛰어야 큰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동네를 뛰어다녀야 그게 아이다. 더 나아가 구르고 뒹굴고 물어뜯고 때로 비명도 지르며 적어도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큰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땅바닥을 박박 기고 코든 땅이든 파야 큰다. 이 천둥벌거숭이들은 아직 사람이 아니다. 짐승에 가깝다. 짐승이 울부짖고 뛰고 물어뜯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다. 짐승이 사람 되려면 반드시 길게 놀아야 한다.

하루를 이렇게 보낸 아이들은 밤 9시를 넘기지 못하고 졸려서 퍽퍽 나가떨어진다. 밤 9시 전에 곯아떨어져야 아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시끄럽다고 소리도 못 지르게 하고, 뛰지도 못하게 하고, 울지도 못하게 하고, 뛰어내리거나 구르지도 못하게 막는다. 얌전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으란다. 그래서 세상에 놀지 못해, 놀 수 없어서 고통받는 아이들이 늘어간다. 놀지 못해 답답하기만 한 심정을 애써 꾹꾹 눌러보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 마음속에 응어리만 차곡차곡 쌓인다. 이것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다.

그런데 어쩌랴!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 말을 곧잘 듣는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가 끝나고 이런저런 학원에 가라고 하면 잘 간다. 그러나 새겨들으시라. 아이들이 세상에 나올 때 안고 나오는 ‘소리 지르기, 달음박질, 뛰어내리기, 구르기, 울기, 물어뜯기, 코 파기, 던지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그대로 꾹꾹 눌러놓은 것임을 말이다.

소리도 못 지르고 울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사는 아이들이 언제까지 견딜까. 한국은 아이들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 생체실험의 극한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곳이다. 당신이 직장의 개가 아니듯 아이 또한 당신의 애완견이 아니다.

이제 조용히 앉아서 책도 잠시 보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때가 가까웠는데 오래도록 꾹꾹 눌러놓았던 것들이 마구 저 깊은 곳에서 밀고 올라와 초등학교 교실의 아이는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기자명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