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에 구인 공고를 올린 10개 업체 가운데 한 군데에 전화를 했더니 당일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자 바로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매주 월~금요일 낮 12시부터 6시까지, 시급 8000원, 1시간마다 10분씩 휴식이 보장되고, 비 오는 날은 일하지 않으며, 임금은 주급이 아닌 월급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거리는 시끄럽고 광고는 넘쳐났다. 음식 메뉴 가격이 적힌 식당 홍보 입간판, 날씬한 여성의 허리 사진이 찍힌 요가 학원 배너, 로또 당첨 명당을 알리는 빨간 현수막…. 혼자 서서 바람에 나부끼는 이런 무인 홍보물 외에, 아르바이트로 고용돼 피켓과 함께 서 있는 ‘사람’ 경쟁자도 역 주변에 3명이나 더 있었다. 이들도 나처럼 시간도 보낼 겸 사람들의 시선도 피할 겸, 오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울 신촌·강남·종로·명동 등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쉽게 이런 인간 광고판을 목격할 수 있다. 유학원, 영어 학원, 식당, 술집, 멀티방 등 광고 대상도 다양하다. 지방에는 미분양 아파트 청약을 모집하는 인간 광고판도 등장했다. 주로 피켓을 들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가만히 서 있는 방식이 보편적이지만 아르바이트생에게 현수막을 백팩에 매달아 거리를 천천히 걸어다니게 하거나, 정장을 입고 서 있게 하거나, 동물 탈을 쓰게 하거나, LED 모니터(휴먼 배너)를 등에 메는 등의 방식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
“신선도 떨어져 사라질 수도”
인파 가운데에서 광고판을 들고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구직자들은 비교적 높은 시급(7000~1만원) 때문에 이 일을 선택한다. 지난 3월부터 한 달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유학원 피켓을 들고 하루 5시간을 보낸 이성정씨(29·현 보안요원)는 “인터넷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보니, 대부분의 아르바이트는 최저임금 수준인 5000원대 시급을 주는데 이 일은 8000원을 준다기에 일을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보름간 종각역 근처에서 일한 김 아무개씨(26·취업준비생)도 “낮시간에 짧게, 괜찮은 시급으로 일할 수 있어서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이들을 고용한 광고주들이 노리는 가장 큰 효과는 ‘주목성’이다. 광고 대행업체 위메이크애드의 김지현 대표는 “물통 엑스 배너(물통으로 고정시켜놓는 입간판)와 인간 광고판 두 개가 서 있다고 했을 때 어디에 먼저 눈길이 가겠는가? 아무래도 사람이 들고 있으면 주목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광고업체 시우애드컴퍼니 최봉원 대표는 “몇 해 전 ‘벌서기 마케팅’이라고, 한 개인사업자가 광고판을 높이 들고 번화가에 서 있어서 사람들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쳐다봐 광고 효과를 높인 사례가 있었는데, 그렇게 간헐적으로 아이디어 차원에서 시작된 이런 광고 기법이 최근 1~2년 사이 시장에 많이 보급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최 대표는 또 “현수막 설치, 전단 배포 등 우리가 거리에서 접하는 많은 광고가 알고 보면 옥외광고법상 불법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인간 활용 광고는 사람이 물건을 들고 그냥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에 저촉될 염려가 없다는 이점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효과가 길게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인간 광고판’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종각역 앞에서 유학원 피켓을 들고 있던 김 아무개씨는 “의외로 사람들이 별로 쳐다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보름 동안 나에게 직접 유학원 위치를 물어보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국민대 광고학과 지준형 교수는 “인간 광고판은 최근 많이 시도되는 ‘게릴라 마케팅’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신선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거리에서 자연스레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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