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80만인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가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내몰렸다. 3월16일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무장관들은 키프로스에 100억 유로(약 14조4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키프로스 은행의 모든 예금 계좌에 일회성 부담금을 물리라고 권고했다. 즉 10만 유로 이상의 예금에 대해서는 9.9%, 그 이하 예금에 대해서는 6.75%의 부담금을 부과해서 채무 변제에 필요한 자금(170억 유로)의 일부인 58억 유로를 마련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예금자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러시아도 즉각 가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키프로스 사태로 열린 긴급회의에서 만일 키프로스 정부가 (유로존 회원국의 요구대로) 예금 부담금을 부과한다면 이는 ‘불공정하고 위험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도 예금 부담금과 같은 조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나 행해지던 관행으로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키프로스의 결정에 막대한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은행권이 러시아의 자금 세탁처란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키프로스 은행 예금(680억 유로) 중 러시아 투자자들의 예금이 190억 달러(약 21조원)에 달할 것이라 추산했다. 예금 총액의 30% 이상(240억 유로)이 러시아 투자금이란 주장도 있다. 만일 예금자들에게 부담금을 물릴 경우 러시아 투자자들이 입을 손실은 20억 달러(약 2조2000억원) 이상일 것이라 추산된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이 키프로스 구제금융에 예금 부담금이란 이례적인 조건을 제시한 이면에 독일과 러시아 간의 이권 갈등이 있다고 본다. 유로존 최대 채권국이자 구제금융을 주도하는 독일은 키프로스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 및 협상이 달갑지 않다. 메르켈 총리의 한 측근은 “키프로스는 오로지 트로이카(EU·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와만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독일은 자국의 세금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존 방식대로 구제금융을 제공할 경우, 독일 납세자들의 세금이 키프로스 은행에 투자한 러시아 올리가리히(신흥 부유층)에게 이익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독일 정보부는 키프로스의 은행 및 러시아 내 은행 지점들을 올리가리히의 불법적인 돈세탁 창구 및 조세 피난처로 지목한 바 있다. 독일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구제금융을 미끼로 키프로스의 천연자원 개발권에 눈독을 들일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인근 해역에는 천연가스 34억㎥와 석유 2억3500만t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9000달러 수준이었던 키프로스가 구제금융을 받을 처지로 전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그리스 구제금융에서 원인을 찾는다. 지중해의 빼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관광을 주산업으로 삼았던 키프로스는 2008년 유로존에 흡수되면서 금융 산업을 정책적으로 키웠다. 키프로스는 인구의 80%가 그리스인이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이런 이유로 키프로스 은행들은 그리스 국채에 거금을 투자했다. 이와 동시에 조세 피난처를 찾는 해외 자금이 대량으로 유입돼 은행은 점차 덩치를 불렸고, 특히 높은 이자와 돈세탁을 노린 러시아 투자자들이 대거 몰리면서 판은 더욱 커졌다.


이로써 키프로스의 금융 산업은 2011년 GDP의 8배 이상으로 비대해졌다. 그런데 그리스가 재정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리스가 재정위기에 돌입하기 직전인 2010년 키프로스 은행들이 보유한 그리스 국채는 GDP의 1.6배에 이르렀고, 그리스 재정 파탄으로 45억 유로에 이르는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구제금융 비준, 키프로스 의회에서 부결

사실 EU가 요구한 예금 부담금은 이례적인 것이다. 디폴트 위기에 처했던 여타 국가들은 공공 자산 매각이나 증세를 통한 해법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키프로스는 인구가 80만명에 불과하고 은행 부문의 손실이 상당해서 예금 부담금이란 조치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예금 부담금을 전제한 구제금융 비준은 키프로스 의회에서 부결되었다(키프로스 의회에는 친러시아 성향의 인사가 대거 포진해 있다). 결국 키프로스 정부는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를 우려해 은행 업무를 일시 정지시키고 비상대책인 ‘플랜B’를 가동했다. 키프로스 중앙은행은 은행 업무가 재개되면 예금이 10% 이상 빠져나갈 것이라 우려한다.

‘플랜B’는 은행 구조조정을 비롯해 국채 추가 발행, 러시아 차관 추가 도입 등을 골자로 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50억 유로 규모로 비축된 사회보장 기금을 쓰거나 장차 개발할 천연가스의 수익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을 은행 예금과 교환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키프로스가 위기를 탈출하려면 독일을 비롯한 EU 국가들과 러시아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실제로 키프로스는 양다리 전략을 짠 듯하다. 의회에서 구제금융 비준이 거부된 직후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은 독일 메르켈 총리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협조를 요청했다. EU와 러시아가 참여하는 ‘국유재산 관리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취지도 같은 맥락이다.

어쨌든 키프로스의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무엇보다 은행의 신뢰 실추로 뱅크런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월 키프로스 구제금융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키프로스 은행에서 17억 유로가 빠져나간 선례가 있다. 전문가들은 키프로스 사태가 금융시장에 앞서 정치권에 미칠 영향이 더 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추된 정치권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는 경고이다.

기자명 정다원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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