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본명이 조윤석인 루시드 폴의 〈무국적 요리〉 (나무+나무, 2013)는 단편소설 여덟 편을 모은 창작집이다. 1998년부터 서울의 인디 음악 신에서 활동했던 그는, 돌연 스위스로 건너가 2008년 로잔 연방공과대학(EPFL)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 다음 귀국해서 ‘도로 딴따라’가 된 모양인데, 이번에는 소설집까지 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몇몇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똑(시작)’에 맞는 ‘딱(종결)’이 없다는 점이다. ‘행성이다’가 대표적이다. 우주 비행사였던 유 안드레의 어머니는 그가 돌을 갓 지났을 무렵 행방불명됐다. 작중의 ‘설’에 따르면 인간이 늙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인데, 스트레스의 원천은 지구의 중력이다. 그러므로 우주 속에서 지구가 가진 중력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행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현재 평균 수명이 100살에 육박하는 지구인은 그 행성에서 1000살을 살 수 있다. 그곳에서는 지구에서 보낸 10년이 1년밖에 되지 않는다. 
 

유 안드레의 어머니는 우주의 도원경을 찾는 소행성 탐사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적인 협력 속에서 진행되던 비밀 프로젝트가 국제분쟁 때문에 흐지부지되면서, 어머니를 비롯한 숱한 프로젝트 관련자가 문제의 행성에 버려지게 되었다. 성인이 된 유 안드레는 아버지로부터 “엄마는 행성에 살고 있다”라는 유언을 듣게 되고, 마침 30년 만에 공개적으로 재개된 소행성 탐사 프로젝트의 우주인 선발 시험에 응한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자 3명에 든 그는,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어머니가 있는 행성으로 떠난다.  

그가 행성에 도착해 지구의 여느 도시 풍경과 같은 공항 바깥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들, 유 안드레에게’라고 쓰인 짤막한 편지가 배달된다. 어머니의 편지는 이 소설의 대미이자 결정적인 미리니름(스포일러)이지만, 논의를 위해서는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엄마는 너의 소식을 듣고 너무나 자랑스러워 밤잠을 설쳤단다. …죽기 전에 우리 아들을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기도를 했단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임무를 잘 수행하고 곧 만나자꾸나. …사랑한다. 아들아. 엄마를 용서해다오. 엄마가 맛있는 쇠고기 요리를 준비해두마. 횡성에서 엄마가.”

완벽한 기승전결 갖춘 빼어난 작품

행성과 횡성으로 말놀이를 하면서 ‘쇠고기 요리(횡성 한우)’까지 끌어오는 이 썰렁한 대미는, 작가의 미숙함이 노출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집에는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진 작품이 그렇지 않은 작품보다 더 많다. ‘탕’이 대표적이다. 주인공 마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 목욕탕을 운영했던 고향을 떠나 공단 도시로 돈을 벌려고 왔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노동을 하는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일이 끝난 밤이나 주말 혹은 휴일에 뜨뜻하게 몸을 풀어줄 수 있는 그런 목욕탕”이 자취방 근처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에 단골 목욕탕 하나만 있어도 “모든 걸 견뎌낼 수 있는 희망” 하나가 생긴 것처럼 의지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잔업을 하고 밤늦게 퇴근한 어느 날, 마유는 자취방 열쇠를 공장의 작업대에 흘리고 온 것을 알고 24시간 목욕탕을 찾아 나선다. 그런 끝에 찾아낸 목욕탕의 후텁지근한 탕 냄새는 그를 단숨에 고향으로 인도하면서 삶의 활력마저 일깨웠다. “이렇게 매일 목욕할 수만 있다면 손을 찌르는 유리섬유며 허벅지에 난 발진이며, 전부 싹 없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간신히 찾아낸 소박한 낙원은 약간 정신이 이상한 노인 손

님의 등장으로 깨어진다. 마유와 함께 목욕을 방해받은 초면의 중년 남자는 마유에게 술을 사겠노라고 제의하고, 두 사람은 술집을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 유난히 친절했던 중년 남자가 마유를 꼭 껴안으며 귓전에 속삭였다. “자기… 인자, 연애하러… 가까…?” 이 작품의 제목은 마유가 중년 남자의 머리를 소주병으로 내리치는 소리다. “두 번째 빈 병을 들고 똑같은 곳을 내리쳤다. 탕. 세 병째, 탕. 네 병째 탕.”

세부를 많이 덜어내고 소개한 ‘탕’은 그 자체로 빼어난 작품이면서, 이와 유사한 작품과 성좌를 이루기를 원한다. 먼저 장 폴 사르트르의 ‘에로스트라트’.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배불뚝이 중년 회사원은 정기적으로 창녀를 사지만 성관계를 치를 용기는 없다. 힘도 없고 자신을 방어할 줄도 모른다는 열등감을 가진 그는 늘 ‘전부터 날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권총을 장만하고,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싶은 충동을 실행한다. 다음은, 박상륭의 ‘詩人 一家네 겨울’.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홍선이도 ‘에로스트라트’의 열등감 많은 주인공처럼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내게 주의를 쏟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구에서 자기 동네에 사는 거지 영감을 돌로 쳐 죽인다.

주인공의 자기기만과 오인 공격

열거한 세 작품을 하나의 계보로 묶어주는 것은, ‘행위로의 이행’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 혹은 주체의 무기력을 감추기 위한 과잉 행동을 가리키는 이것은, 행위자가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억압의 구조와 정면 대결하기를 회피한 결과로 생겨나는 자기기만이자 오인 공격이다. ‘탕’의 주인공이 빈 병을 거듭 내리쳐야 할 곳은 ‘호모’가 아니라 8개월째 목욕탕을 찾아갈 수 없게 만든 고용주이며, ‘에로스트라트’의 주인공이 총질을 해야 할 곳 또한 거리에 쏟아져 나온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그를 ‘왕따’시키고 직장에서 해고한 더 큰 적(체제)이다. 

‘詩人 一家네 겨울’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행위로의 이행 역시, 그의 말처럼 유명해지고 싶은 피상적인 욕구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었다. 그가 거지 영감을 돌로 내리치며 내뱉은 복음(?)을 들어보라. “오늘 밤은 획기적인 밤이야! 역사가 바뀌는 밤이라구! 가난이, 질병이, 불쌍함이, 불행이, 비극이, 비천함이, 늙음이,- 그런 모든 것이 죽어버리는 밤이다!” 그래서 역사가 바뀌었던가? 홍선은 거지 영감이나 자신처럼 비루한 인생을 양산하는 체제를 보지 못했다.

요즘의 한국 소설이나 대중문화가 점점 잔혹해지고 있다면, 이런 자기기만과 오인 공격에 빠져 있지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예로 든 소설들이 보여주듯이 억압 구조와의 정면 승부를 피한 열등인이 마음껏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체제 밖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호모나 거지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체제의 잉여물’인 시인·예술가·교수 따위나 ‘조지는’ 것이고….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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