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최홍만(오른쪽)은 15전12승3패를 기록하고 있으나 레미 본야스키 등 베테랑과의 대전 결과는 4승3패다.

지난 9월29일 서울에서 K-1 GP(Grand Prix)8강을 가리는 16강전이 펼쳐졌다. 대회의 메인 매치를 장식한 것은 한때 씨름 천하장사였으며 이제는 파이터로 더 알려진 최홍만과 마이티 모의 대전이었다. 이번 대회는 최홍만과 함께 모래판을 휩쓸었던 전 씨름 천하장사 김영현이 데뷔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김영현의 상대는 일본 프로 레슬러 출신의 '백전노장' 야나기사와 류우시(35)였다. K-1이 두 거한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K-1은 1993년에 창설한 이후 대회의 규모가 점점 커졌다. 대회를 운영하는 FEG(Fighting & Entertainment Group)의 위상 역시 높아졌다. 하지만 2003년을 분기점으로 일본 내 격투기 산업이 포화상태에 돌입했고 K-1을 만들었던 이시이 가지요시 관장의 세금 포탈 사건이 터지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라이벌 단체였던 프라이드의 거센 추격과 K-1을 대표하는 크로캅, 마크 헌트, 스테판 레코 등의 이적과 같은 악재들이 겹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오랫동안 K-1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노쇠하면서 화끈한 경기보다 ‘이기기 위한 경기’를 하기 시작하자 K-1 링에서만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한들의 출현은 이러한 K-1의 위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즉 K-1은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 살길을 밥 샙의 이례적인 등장에서 찾을 수 있다. ‘K-1 서바이벌 2002’에 등장한 보브 샙은 데뷔 경기에서 어마어마한 근육질과 거대한 육체로 일본의 차세대 유망주인 나가사코 츠요시를 농락했다. 그해 보브 샙은 K-1 월드 그랑프리(GP) 파이널에서, 4회에 걸쳐 GP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미스터 퍼펙트’ 어니스트 후스트를 상대로 실신 KO 승리를 이끌어내며 열도를 흥분하게 했다. 자신의 손에 상처가 난 것도 모른 채 상대에게 위압적인 주먹을 휘둘렀던 이 ‘야수의 본능’은 K-1이 새롭게 전환하는 데 중요한 불씨가 된다.

아케보노의 등장은 그러한 거한 출현의 정점이었다. 그는 스모 역사상 최강의 요코즈나로 불렸다. 스모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던 요코즈나가 K-1에 등장한 것이다. 아케보노의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K-1은 새로운 팬층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경기력이었다. 입식격투기란 상대를 밀쳐 경기장으로 밀어내는 스모와는 달리, 타격을 통해 상대를 쓰러뜨려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경기였다. 몸무게 220kg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아케보노는 상대를 쫓아다니다가 지치고 말았다. 결국 이벤트용 파이터라는 오명을 얻고 쓸쓸히 퇴장한다. K-1은 제2의 아케보노가 필요했다.

최홍만은 기본적으로 예능인 기질이 다분했다. 그는 테크노 춤도 잘 춘다. 거대한 신장에 비해 유연한 몸도 타고났다. 게다가 방송에 나오는 자신을 즐길 줄 알았다. 운동 선수이지만 광대 노릇도 잘한 것이다. 최홍만이 가지는 입지에 따라 한국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예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결과적으로 최홍만이 K-1에 등장하면서 1억원 남짓하던 중계권료가 연간 100억원에 육박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방송사들의 유별난 경쟁도 경쟁이었지만 아시아의 새로운 시장 진입 시나리오가 적중한 것이다.

최홍만, 세계 제패에는 시간 걸릴 듯

ⓒ뉴시스1976년생으로 뒤늦게 격투기에 입문한 김영현(오른쪽)은 첫 경기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최홍만의 인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2005년 K-1 아시아 GP 서울이었다. 전년도 챔피언이었던 카오클라이와 다른 조에서 출발한 최홍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처녀 출전 선수라고 할 수 있는 와카쇼, 그리고 전혀 격투기에 소질을 보이지 못했던 아케보노를 이기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두 선수와의 경기를 통해 3라운드만을 뛰고 결승에 오른다. 반대로 카오클라이는 다른 조에서 연장까지 치르는 등 악전고투한다. 상대였던 장징준과 호리 히라쿠 모두 자국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선수들이었다. 이와 같은 치열한 경기의 후에 최홍만과 만난 카오클라이는 이 경기에 패배와 판정에 아쉬움을 가졌다. 최홍만의 공격에는 “단 하나의 유효타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K-1 아시아 GP의 챔피언은 FEG가 만들어준 인상이 짙다. 애당초 아시아 GP에는 조 추첨 같은 제도가 없다. 그저 FEG 쪽에서 배정하는 것이 전부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슈퍼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최홍만의 모든 경기는 케이블 방송에서 매주 볼 수 있을 만큼 노출이 잦았다. 그만큼 시청률이 높았다. 김영현의 등장 역시 그러한 FEG의 상업적인 노림수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최홍만은 K-1 무대에서 총 15경기를 가졌다. 총전적 12승 3패로 성적이 괜찮다. 하지만 카오클라이, 레미 본야스키, 세미 슐트, 제롬 르 배너, 마이티 모, 게리 굿리지 등 베테랑들과의 경기로 한정하면 결과는 시원치 않다. 7전 4승 3패. 승률이 현격히 떨어진다. 톱 클래스라고 할 수 있는 세미 슐트에게 이겼지만 이 경기에 대해서는 뒷말이 많다. 지난 2006년 서울에서 벌어진 이 경기의 결과는 2:1 판정승이었다. 홈 어드밴티지가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이날 경기도중 등을 돌렸다고 세미 슐트가 주의를 받았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이 행동에 대해 주의를 줄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져보면 최홍만은 톱 클래스의 선수에게는 단 한 번도 화끈한 승리를 얻어내지 못했다. 최홍만이 한국의 에이스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 제패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김영현은 어떨까? 김영현의 경기 능력은 데뷔 시절 최홍만과 비교해 보는 게 좋을 듯하다. 당시 빠른 시간 내에 링에 서야 했던 최홍만은 복싱 스킬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김영현은 최홍만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복싱 대신 무에타이를 시작했다. 첫 경기에서 김영현은 원투 펀치에 이은 하단 킥으로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육체로 빈틈없이 상대를 압박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격투 센스라고 하기에는 아직 힘들다. 또한 김영현은 1976년생으로 최홍만보다 네 살이나 많다. 씨름과 전혀 다른 근육을 써야 하는 초보자에게 나이는 훨씬 부담스럽다. 또한 김영현에 대해서 FEG가 얼마나 배려해 줄지 알 수 없다. 그가 성장하는 데 주최 측의 배려가 실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최홍만이든 김영현이든, 두 거한이 K-1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아직 험하고 멀어 보인다.

기자명 김영훈 (격투기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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