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전〉 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펴냄
오랫동안 마음은 종교의 소관이었고 몸은 의학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몸을 배제한 마음을, 의학은 마음을 괄호 친 몸만을 다루었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몸과 마음의 행정을 두루 살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문학으로 가능한 일일까. 한때는 믿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실력 행사를 저지하기 어렵다. 그런 책은 과거의 나와 화해하게 해주고 현재의 나를 이해하게 하지만 미래의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책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겸허하게 손 내미는 책이 좋다. 김소연의 〈마음사전〉(마음산책 펴냄)과 권혁웅의 〈두근두근〉(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이 최근 그 대열에 동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 뛰어난 시인들의 고품격 에세이다.

김소연은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이해’) 좀 얄밉다. 반박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반박하기 어렵게 써놓았으니까. ‘설렘’을 한 줄로 설명한 대목은 그냥 시다.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애틋함’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참혹’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폭우로 인한 참사”란다.

권혁웅은 몸에 대해 말한다. “당신의 손이 이마 위에 얹힌 처마가 될 때, 당신은 가출한 동거인을 근심하는 독방이다. 당신의 손이 무거운 얼굴을 지탱하는 얇은 기둥일 때, 당신은 혼곤(昏困)에 정신을 내어준 빈 부대자루다. 당신의 손이 먼 곳을 향해 몰려가는 파도처럼 너울댈 때, 당신은 홀로 떨어진 섬을 그리워하는 바다다. (…) 그리고 당신의 손이 바위에 붙은 미역처럼 그 사람의 얼굴을 만질 때, 당신은 다시는 떠나지 않을 젖은 눈이다. 거기서 꽃이 필 것이다. 어서어서 비둘기가 날아갈 것이다.”(‘마술사의 손’)

〈두근두근〉 권혁웅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두 사람의 공통점 하나를 말하겠다. 좋은 문장에도 단계가 있다. 좀 좋은 문장을 읽으면 뭔가를 도둑맞은 것 같아 허탈해진다. “아이쿠, 내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는데.”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뿌연 안개 속이던 무언가가 돌연 선명해진다. “세상을 보는 창 하나가 새로 열린 것 같아요.” 더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한동안 멍청해진다. 그런 문장을 읽고 나면 동일한 대상을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이런 문장, 두 사람의 책에 매우 많다.

뛰어난 시인의 고품격 에세이

사소한 차이 하나를 말하겠다. 김소연은 마음에 대해 말할 때 학살·처형·난사(亂射) 같은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쓴다. 그런데 그게 참 그럴듯하다. 아무래도 마음이라는 것은 전쟁터일 테니까. 그 말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무서운 말이란 본래 아주아주 슬픈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권혁웅은 우리가 잘 모르는 단어를 찾아내서 쓰기 좋게 제공하거나 잘 알지만 음미해본 적 없는 단어를 환하게 되살려 놓는다. 말을 애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의 글을 보면서 ‘자동사적 글쓰기’(롤랑 바르트)란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아무래도 시인에게는 말이 애인일 테니까.

클림트의 Expectation.
좀 덜 사소한 차이 하나를 말하겠다. 김소연이 마음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마음을 관리하는 자의 섬세함으로 말한다. 권혁웅이 몸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몸을 사용하는 자의 분주함으로 말한다. 김소연의 경영학에는 체험의 무늬가 은은하게 덮여 있고 권혁웅의 성애학에는 자신만만한 지성의 섹시함이 있다. 그런 특징이 김소연의 글을 우아하게 만들고 권혁웅의 글을 뜨겁게 만든다. 중요한 차이 하나를 말하겠다. 김소연의 책에는 그녀가 직접 찍은 사진이 실려 있고 권혁웅의 책에는 이연미 화가의 발랄한 그림이 빼곡하다. 마음은 찍는 것이고 몸은 그리는 것인가 보다.

소설가 박상륭 선생은 일찍이 몸과 맘(마음)과 말을 합쳐 ‘뫎’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몸에서 말로, 말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차적 개벽을 설(說)하기 위해서였다. 그 논의와 무관한 자리에서 보더라도 몸과 마음과 말은 본래 떨어질 수 없는 덩어리다. 김소연은 마음과 말을, 권혁웅은 몸과 말을 엮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어찌 각방살이를 하겠는가. 각각 마음 공부와 몸 공부에 매진하는 이 두 사람의 책은 서로가 서로의 참고서다. 이미 스스로 당당한 사유들이지만 함께 읽으면 더불어 풍성해질 것이다. 평론가가 중신아비는 아니지만, 나는 두 책이 서로 잘됐으면 좋겠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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