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끄는 한식 세계화의 주요 아이템 중 하나가 떡볶이이다. 정부 예산으로 떡볶이연구소까지 차렸다. 이 연구소에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춘 떡볶이라면서 개발한 음식을 본 적이 있다. 가래떡에 크림소스니 토마토소스를 넣고 볶은 것인데, 이탈리아의 파스타 조리법에 가래떡을 넣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외국인이 싫어할 것 같은 고추장을 빼고 외국인이 좋아할 것 같은 소스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개발’한 것이다. 또 고추장을 넣지 않는 ‘전통의 떡볶이’가 하나 있었으면 했는지 간장 양념의 떡볶이를 두고 궁중떡볶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리학과 실습 수준의 음식을 정부 예산으로 한 연구 결과라고 내놓으니 보기에 민망했다. 가래떡으로 할 수 있는 음식이란 것이 빤할 수밖에 없는데, 한식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보여주려 하니 이런 억지가 생기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신당동 떡볶이는 떡전골에 가깝다. 공기밥을 비벼 먹기도 한다(오른쪽). 왼쪽은 간장 양념으로 번철에 볶는 떡볶이이다. 가장 고전적인 떡볶이일 것이다. 이제는 귀하다.

떡볶이라는 이름에는 ‘가래떡을 볶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새로 개발된 떡볶이를 보면, 팬에서 열심히 볶는다. 볶으려니 이와 비슷한 음식으로 파스타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파스타 조리법에 가래떡을 추가해 새로운 떡볶이라며 내놓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중이 일반적으로 이르는 떡볶이는 볶지 않는다. 냄비에 넣고 끓인다. 조림이나 탕에 가깝다. 이름을 제대로 붙이자면 ‘떡조림’이나 ‘떡탕’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니 가래떡으로 조리하는 또 다른 전통 음식이 떠오른다. 떡전골이다. 떡전골은 가래떡에 여러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이는 탕이다. 설날에 먹는 떡국에 그 계통이 닿아 있는 음식이다. 이것을 한 그릇에 담으면 떡국이다. 예전에는 떡전골을 떡탕이라 불렀고 떡국도 떡탕이라 했다. 떡볶이는, 특히 냄비에 가래떡과 여러 재료를 넣고 끓이는 떡볶이는, 떡국과 함께 ‘가래떡으로 조리하는 탕’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들 수 있다.

철판 위에서 조리되는 ‘포장마차 떡볶이’는 떡조림이라 할 수 있는데, ‘가래떡으로 조리되는 탕’의 방계에 넣을 수 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떡볶이는 그 이름과 달리 ‘탕이나 조림의 떡볶이’인 것이다. 떡볶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면 한국인의 떡볶이 기호가 보이지 않으며, 결국은 한국인도 낯설어하는 별스러운 떡볶이를 개발해 이를 한국 떡볶이라고 하자며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떡볶이를 두고 벌어지는 이 같은 혼란은 애초 떡볶이라고 부르는 음식이 따로 있었는데 떡전골이나 떡조림에도 이 떡볶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초의 떡볶이는 가래떡에 여러 채소와 고기를 넣고 간장 양념으로 볶는 음식이었다. 설날 상차림에 오르는 음식이다. 이 떡볶이를 요즘에는 궁중떡볶이라 하는데, 특별히 궁중에서 이를 먹었다는 근거는 없다. 설날의 가래떡 전통은 유구한 것이니 조선에서 왕가·양반·상민 할 것 없이 두루 먹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길거리 음식으로 떡볶이가 등장했다. 전통의 떡볶이가 간소화한 것이었다. 동그란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간장 양념을 한 가래떡을 볶았다. 시장 입구에 이런 떡볶이 좌판이 흔히 있었다. 여기에 어느 순간 고춧가루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매운 떡볶이는 이 좌판의 번철 떡볶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번철 떡볶이는 서울의 재래시장에 일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기름떡볶이라고 부른다.


‘고삐리’를 해방시킨 신당동 떡볶이

신당동 토박이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지금의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떡볶이 좌판이 셋 있었다고 전한다. 신당동은 한국전쟁 후 피란민이 몰려들어 조성된 동네였고, 그래서 주민은 가난했다. 주변에는 성동고·한양공고·무학여고 등 학교가 많았다. 시장이 가깝고, 또 그 골목에 극장이 있었다. 고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먹을거리 좌판이 있기에 딱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떡볶이 장사가 잘되자 신당동 주민은 여기저기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떡볶이 타운’이 조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서울의 고등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황교익 제공신당동 떡볶이집에는 뮤직박스가 아직 있다(오른쪽). 디스크 자키도 있다. 신청곡도 받고 사연도 전해준다. 〈써니〉 세대가 거쳐간 곳이다.
1970년대에 들자 좌판 떡볶이로 돈을 번 몇몇 가게가 식당 모양을 갖추었다. 이때 신당동 떡볶이는 크게 변신하는데, 드럼통에 연탄불을 넣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렸다. 냄비에는 떡·어묵·당면·달걀 따위가 들어갔다. 떡전골 형태인데도 이를 떡볶이라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가래떡을 이용한 외식 음식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떡볶이이니 그 이름을 따라한 것이었다. 이 냄비 떡볶이가 신당동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1970년대에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생겼을 수가 있는데, 특히 1970년대 중반 프로판 가스의 보급이 이 냄비 떡볶이의 확산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1970년대 고등학생은 유신 교육의 억압에 놓여 있었다. 일제의 잔재인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밀어야 했다. 교련이라는 이름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억압 속 고등학생들에게 대학은 곧 해방을 뜻했다. 대학만 가면 (간혹 장발 단속에 걸리기는 했지만) 머리를 기를 수 있었고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칠 수 있으며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학생의 공간으로 음악감상실, 음악다방이 있었다. 여기에 고등학생은 들어갈 수 없었다. 고등학생에게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은 미래의 해방구로 보였을 것이다. 고등학생이 출입할 수 있는 분식집에 뮤직박스를 들인 일은 고등학생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뛰어난 상술이었다. 전국의 분식집에 뮤직박스가 만들어지고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디제이를 앉혔다. 신당동 떡볶이집도 이 바람을 따랐다. 떡볶이 하나로 고등학생의 성지가 된 신당동은 ‘해방된 고삐리’로 폭발했다. 떡볶이에 몰래 술을 마실 수 있었다는 것, 남녀 학생이 미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신당동만의 ‘매력’이었다.

2011년 현재 신당동 떡볶이집에는 해방을 갈구하는 ‘고삐리’가 없다. 대입 압박은 여전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대체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때 고삐리였던 이들이 옛날의 그 해방을 맛보기 위해 신당동을 찾는다. 휴일이면 이 옛날 고삐리들이 나이 어린 2세의 손을 잡고 신당동 떡볶이집 문을 밀고 들어온다. 극장은 사라지고 떡볶이집은 간판을 바꾸었지만 그 옛날의 떡볶이 맛은 여전하다. 값싼 식재료에 대충 달고 짜고 매운 맛이 전부이다. 친구들끼리 하교하면서 200원씩 모아 한판 걸게 먹던 그 시절 그 떡볶이를 앞에 두고, 그 건너의 2세를 본다. 한때 나에게도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 있었다고 말하려다 만다. 보니엠의 ‘써니’가 흐른다. 신당동의 청춘도 그 경쾌한 음률을 따라 매끄럽게 흐른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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