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는 이렇다. 한창 잘나가던 기수 승호(차태현)가 제주도에서 교통사고를 낸다. 아내가 죽고 승호는 시신경을 다쳤다. 사고 때 함께 뒤집힌 트럭에 말 두 마리가 타고 있었다. 새끼가 죽고 어미는 다리를 다쳤다. 3년 뒤. 왕년의 챔프 승호는 딸 예승(김수정)을 혼자 키우며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산다. 시력은 자꾸 나빠진다. 이젠 대략 정상인의 25.7% 정도밖에 볼 수 없으니 ‘사실상’ 시각장애인. 서울에서 사고치고 제주도에 간다. 우박이를 만난다. 3년 전 승호가 낸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경주마가 되지 못한 바로 그 녀석이다.

그 사고로 새끼를 잃은 뒤, 인간이란 몹쓸 종이 자기 등에 오르는 걸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우박이련만, 처음으로 등에 태운 인간이 하필 승호다. 오케이, 천생연분! ‘루저’끼리 동병상련! 꼴찌들의 의기투합! 이제 우박이는 승호의 눈이 되고 승호는 우박이의 다리가 되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레이스를 시작한다.

웬만한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 끝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한 이야기.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뻔하지 않아서 〈챔프〉는, 올 추석 연휴 개봉작 가운데 ‘개중엔 그래도 제일 볼만한 영화’가 되었다. 총 10억원을 들여 찍었다는 경마 장면 얘기다.


경주마 레이스 장면, 박진감 기대 이상

말과 사람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말이랑 사람이랑 누가 봐도 억지다 싶은 인연을 만들고, 말도 사람도 모두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가, 사람은 물론 말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기까지가 대략 1시간30분.

너무 꽉 끼는 팬티를 입었을 때처럼 극장 의자에 앉아 자꾸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이 다소 안이하고 진부한 각본의 전반부를 잘 참고 견디면 우박이와 승호의 첫 번째 레이스를 보게 된다. 카메라에 담긴 속도감과 박진감이 기대 이상이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또 마지막 레이스까지도. 달린다는 게 말과 기수에겐 과연 어떤 쾌감과 흥분을 주는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이환경 감독이 전작 〈각설탕〉을 연출하며 이미 말 영화의 노하우를 충분히 배우고 익힌 덕분일 것이다.

이제 영화의 후반부.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아역 배우는 자꾸 눈물을 흘린다. 유난히 희고 밝은 털을 가진 말이 종종 붉은 피를 흘린다. 아이가 펑펑 울고 동물이 죽도록 고생하는데 마음이 짠하지 않을 인정머리 없는 한국 관객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건 실화다. 날 때부터 다리를 저는 장애마가 무려 열세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친절하게 동영상까지 준비했다.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기 전,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절름발이 경주마 ‘루나’의 은퇴 경주 동영상이 나온다. 2009년 11월13일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열린 제7경주(1400m). 마지막 코너를 돌 때만 해도 꼴찌였던 루나가 직선 주로에 접어들면서 경이로운 막판 스퍼트를 시작한다. 30m, 20m, 10m… 골~인!

선두 ‘북극성’을 0.1초 차이로 제치며 생애 마지막 경주를 우승으로 장식한 루나의 대역전극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다. 영화 찍느라 고생한 배우와 감독에게는 참 미안한 얘기인데, 〈챔프〉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바로 그때다. 결국 관객은 루나의 그 짧은 실제 경주 장면을 보고 울컥하기 위해 차태현이 주연한 135분짜리 예고편을 보는 셈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끝날 때 실제 핸드볼 선수들의 인터뷰 장면에 감격해서 영화의 모든 약점을 용서해버린 그때처럼, 장애를 딛고 일어선 루나의 아름다운 질주에 홀딱 반해서 난 이 영화의 상투와 신파, 심지어 긴 러닝타임까지도 그만 용서하고 말았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또 한 번 ‘각본 있는 영화’를 위기에서 구원하는 순간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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