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지난해 5월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청년의 꿈과 도전’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 전 학생들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명박 대통령 후보.
다시 20대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이명박’이 화두다. ‘88만원 세대’라는 이름도 아직 낯설기 그지없는데, 20대는 최근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보수’의 어엿한 한 축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보수 언론 등이 제기하는 주요 근거는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20대의 투표 성향이다. 20대 중 다수(42.5%, 12월19일 SBS-TNS 출구조사)가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여기에 전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았던 이회창 후보 지지율(15.7%)까지 합치면 무려 58%가 보수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시사IN〉의 이번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회창 지지율(11.4%)이 조금 적게 나오긴 했지만, 이명박 지지(38.6%)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특히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 가운데 36.4%가 이명박 후보로 지지를 바꾼 것으로 드러나, ‘20대가 좌에서 우로 이동했다’는 일부의 지적이 그저 호사가의 말장난은 아님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20대는 ‘보수화 논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자기 색깔’이 무엇이라고 보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연히 ‘보수’의 압승?

20대 15.8%만이 “나는 보수”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불과 15.8%만이 자기가 ‘보수’ 또는 ‘매우 보수’에 가깝다고 말했다. 반면 자신이 ‘진보’ 또는 ‘매우 진보’라고 한 사람은 34.0%에 이르렀고, 중도는 50.2%였다. 정작 20대 자신은 일각에서 갖다 붙인 ‘보수’ 딱지를 스스로 거부한 셈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이었을까? 이념 성향별로 봤을 때 자기가 보수라고 밝힌 20대가 가장 높은 지지율(45.6%)을 보이긴 했지만, 진보(38.2%)나 중도(36.7%)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20대 가운데 상당수도 이명박 당선자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문국현(22.4%) 후보가 다음으로 높았고, 정동영(18.2%) 이회창(10.6%) 권영길(2.9%) 후보가 그 뒤를 이었다.

대선 득표율 5.8%로 결국 미풍에 그쳤으나 한때 ‘제2의 노풍’을 일으킬 주자로 관심을 모았던 문국현 후보는 전체 20대 대상 조사에서도 16.6%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SBS 대선 출구조사에 나타난 다른 연령대의 문후보 지지율보다 훨씬 높은 수치인데, 20대가 과연 변화를 두려워하며 ‘보수적 처신’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이명박 당선자가 20대로부터 지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국가 경영능력’(76.7%)이었다. 진보(81.5%), 보수(75.0%)가 따로 없었다. 출신 지역·소속 정당(3.1%)이나 이념 성향(2.1%)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중도(4.3%) 또는 보수(0.0%)라고 생각하는 20대에게도 이념 성향은 뒷전이었다. 이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20대가 자기 성향보다는 ‘능력’을 중심으로 투표했음을 보여준다. 아니면 원래 이념 성향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진보·보수의 개념을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당선자의 ‘능력’이 발휘되어야 할 최우선 영역은 두말할 나위 없이 ‘경제 살리기’였다. 20대의 대다수(65.2%)가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갈망했고, 서민·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확대 및 양극화 해소(28.0%), 부동산 문제 해결(3.0%), 교육 문제 해결(1.6%), 남북관계 발전(0.4%)은 후순위로 밀렸다.

눈길을 끈 것은 자기가 진보라고 밝힌 20대의 답변이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 진영에서 주로 강조하는 양극화 해소(34.7%)보다는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58.8%)이 더 시급한 과제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최대 20%의 체감 실업률, 임금노동자 중 50%가 넘는 비정규직 비율 등 ‘88만원 세대’의 열악한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수치로 풀이된다. 〈88만원 세대〉 저자인 박권일은 이를 두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용인되며, 승자독식의 룰에 무조건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이 88만원 세대에게 보편화되어 있다”라고 분석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보수주의도 진보주의도 아닌 오직 ‘먹고사니즘’이라는 얘기다.
 
기업 규제 완화·공무원 감축 전폭 지지

‘먹고사니즘’의 위력은 이념뿐만 아니라 ‘계급적 속성’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20대는 이명박 당선자가 우리 사회 계층 중 상류층(56.6%), 중산층(31.0%)을 주로 대변하고 있으며, 서민·빈곤층(12.4%)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고 답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에 가깝게 당선자의 ‘계급적 속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서민·빈곤층에 속한다고 느끼는 20대(56.0%) 가운데 다수(56.8%)도 당선자가 상류층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봤다.

ⓒ뉴시스대선 시기인 지난해 11월28일, 전국 42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이명박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와 세부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는 이와 무관한 듯 보였다. 상류층(88.9%), 중산층(82.9%)보다는 낮았지만 서민·빈곤층도 70.0%가 이당선자가 ‘향후 국정운영을 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보 성향의 20대도 71.8%가 이명박 정부의 미래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최근 이당선자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기업규제 대폭 완화’ 정책은 일부 대기업에만 특혜를 주고 각종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는 범진보 진영의 반발에 부딪혀 있다. 하지만 전체 20대 중 74%가 계층과 이념을 떠나 이 정책에 찬성표를 던졌다. 20대 서민·빈곤층 가운데 72.1%, 진보 성향 중 70.6%가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는 기업 투자 촉진을 위해 규제를 완화한다는 이당선자 측 논리가 20대 전반에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말해준다.

20대는 부처 축소·공무원 감축을 핵심으로 하는 ‘작은 정부’ 노선에 대해서도 압도적 지지(75%)를 보냈다. 서민·빈곤층(75%), 진보 성향(71.8%) 20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공공성과 감시·감독 기능 강화보다는 효율성 증대·규제 완화·민간경제 활성화가 더 시급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른바 ‘철밥통’으로 불리는 공무원 조직에 대한 반감도 더해졌을 것이다.

특목고·자립형 사립고 확대, 대학입시 자율화가 양극화·서열화를 낳으리라는 걱정도 아직 ‘찻잔 속 태풍’일 뿐이었다. 기업규제 완화·작은 정부 노선보다는 지지도가 낮았지만, 20대의 64%가 찬성 의사를 밝혔고, 서민·빈곤층(64.3%)·진보 성향(62.4%) 20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당선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경부운하 사업에 대한 지지도만은 상황이 달랐다. 반대(58.4%)가 찬성(41.6%)을 누른 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평가와 절차가 생략된 독단적 추진에 조선·중앙 등 보수 언론까지 나서서 비판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비판이 계속되고, 당선자 측도 여러 차례 ‘신중한 추진’을 약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제성도 없는 데다 환경 대재앙만 불러올 것이라는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도 서민·빈곤층의 40%, 진보 성향의 41.8%가 지지를 보낸 것은 예사롭지 않다. 지지자들은 찬성의 가장 큰 이유로 경제 활성화(55.3%)와 일자리 창출(27.9%), 관광 효과(9.6%)를 꼽았다.

한나라당〉대통합민주신당〉창조한국당 순

20대 대다수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한동안 확실히 힘을 실어줄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4월 총선에서 지지할 정당을 묻는 질문에 한나라당(46.0%)이 압승을 거두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겨우

 
12.6%에 그쳤고, 창조한국당이 9.8%, 민주노동당이 7.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한나라당 지지세는 보수(60.8%), 상류·중산층(50.5%)뿐만 아니라 진보(45.9%), 서민·빈곤층(42.5%)에서도 두드러졌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20대는 과연 보수화되었는가? 그 주요 근거인 당선자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이명박은 ‘안티 노무현’의 수혜자이자 ‘노무현 어게인’의 수혜자이다”라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의 분석에서 힘을 잃는 듯 보인다. ‘새로운 정치·경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참여정부에 대한 대중의 항의이자, 동시에 노무현이 이루어주지 못한 것을 보상받고자 하는 요구’라는 것이다.

〈시사IN〉의 이번 여론조사에서 20대 대다수는 자신이 결코 ‘보수’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문국현(16.6%) 등 상대적으로 참신한 후보에게 눈길을 더 많이 돌렸고, ‘낡은 이미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권영길(2.0%), 이인제(0.2%) 후보에게는 가차 없는 심판을 내렸다.

20대에게는 이념이나 계급·계층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로 보인다. 이는 이 당선자와 각종 현안에 대한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나아가 20대 대다수는 공공성·복지·평등 같은 전통적인 ‘진보’의 가치가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빈자리에는 ‘능력’이나 ‘추진력’ ‘효율성’ ‘자율성’ 같은 개념이 새롭게 들어서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든 민주노동당이든 ‘진보’로 분류되는 세력은 진보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 왜 필요한지 논리나 실천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이 당선자는 청계천을 뚫고, 버스 중앙차선을 깔면서 진보의 의미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혹자는 진보·보수의 개념도 잘 모르는 20대에게 면박을 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온 정신이 쏠려 있는 그들에게 진보·보수가 ‘진정’ 무엇인지 공부 좀 하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더구나 20대가 현실을 잘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앞서 밝힌대로 당선자의 기반과 계급적 속성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그들이다. 청년 실업을 비롯해 우리 사회 20대가 겪고 있는 문제가 ‘고용 없는 성장 등 사회구조적 원인’ 때문이라고 보는 응답자도 60.0%에 이르렀다. 반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 부족(17.6%) 때문이라고 답하거나 정부(11.8%), 기업(7.0%)에 책임을 돌리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취업을 못하고 있을 경우 비정규직으로라도 일을 하겠다’는 의사를 20대 다수(64.6%)가 밝힌 사실은 자기가 지금 발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절규처럼 들린다. 그 절규의 강도는 100만원 이하 78.3%, 101만원∼200만원 이하 72.0% 등 가구 소득이 낮을수록 더욱 높아졌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만일 이 수치를 보게 된다면, 가슴 아파해야 할 듯하다. 20대는 비정규직을 마구잡이로 늘려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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