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공영방송이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렇다고 민영방송으로 바꿔버리자는 것은 너무 성급한 주장이 아닐까. 방송사는 단순한 상업적 존재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일찍이 근대 산업혁명 이후의 시민사회를 말하면서 그 핵심을 ‘공공 영역(Public Sphere)’의 존재에 두고 이의 생성과 퇴조를 말한 바 있다. 산업혁명 이후 신흥 자본가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국가로부터 침해받지 않는 독립적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의회 개혁과 언론의 자유였으며,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궁극 목적은 국가로 하여금 시장경제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해서 자기들의 자본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방법으로 시민사회(여기서는 주로 신흥 자본가)의 의견을 대변할 의회를 만들어야 했던 바, 이를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필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언론의 자유는 시장경제 발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의 언론은 따라서 공개적 논쟁, 자유로운 보도,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의 자율성 등을 수단과 목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공공 영역’으로서 언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기 자본주의까지 상황이다. 자본의 힘이 점차 커짐에 따라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공공 영역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확장된 자본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예를 들면 정치 자금을 지원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홍보를 강화하면서 공공 영역의 자율성은 감소되었다는 게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언론이 매스미디어로서 대규모가 되면서 자연히 그 자체가 큰 자본이 되고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여론을 형성하려 했기 때문에 역시 공공 영역으로서의 구실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공영방송이 설립되고 발전해온 이유는 바로 이런 역사성에 기인한다. 방송의 공론적 기능이 시장논리에 의해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공공 방송기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 팽창 시대의 언론에 대한 반성이랄까.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BBC가 태어났고, 초기부터 상업방송 체제를 유지해온 미국에서도 같은 이유로 공영방송인 PBS를 만들어냈다. 이것으로 끝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 예를 든 BBC나 PBS나 모두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 위협의 주체는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정치 권력으로 대표되는 국가다. BBC는 대처 시절의 포클랜드 전쟁 당시부터 정부와 대립했고, 최근 이라크 전쟁 중에는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전쟁에 가담하기 위해 정보 문건을 조작했다는 보도를 냈다가 사장이 해임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PBS는 닉슨 시절부터 미운털이 박힌 이후 정부가 몇 차례 바뀌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정치 권력의 위협에도 꿋꿋이 존재하는 BBC와 PBS

우리는 어떨까. 앞서 말한 서구의 공영방송 태동의 긴 역사성에 비해 우리의 공영방송 체제는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한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5공화국 정권이 하루아침에 통폐합을 통해 공영체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방송에 대한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공영방송 체제가 갖는 철학 자체를 폄훼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 공영방송은 권위주의 정부가 끝난 후 뒤늦게나마 그것을 제대로 실천해보자는 와중에 몇 번이나 존립 논란에 휩싸이곤 해왔다.

물론 공영방송이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해왔느냐에 대한 비판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민영방송으로 바꿔버리자고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 아닐까. 서구의 공영방송 태동의 과정을 길게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쉽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도움으로 태어나 결국 국가의 위협을 받고 있는 BBC와 PBS도 해체하거나 민영화시키라는 압력이 비등하긴 하지만, 큰 자본의 시장 논리에만 치우친 방송 경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염려에 힘입어 계속 존립하고 있다. 방송사는 단순한 상업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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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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