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 장관께.
너스레 따위는 하지 않으련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무엇을 해달라고 청원(請願)하는 식의 이른바 ‘연민 마케팅’ 따위도 일체 사양한다. 나는 공개서한 형식을 빌린 이 글에서 한국작가회의(이사장 구중서)에 대해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시위 불참 ‘확인서’를 요구한 일로 문인들의 분노와 모멸감이 극에 달했으며, 이번 사태의 배후는 유인촌 장관과 이명박 정부에 그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분노할 때는 분노하는 게 가장 정직한 감정의 표출이 된다는 점을 나는 문학에서 배웠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 글은 유인촌 장관 한 사람에 대해 미처 발화되지 못한 ‘한풀이식’의 어두운 열정을 분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어두운 열정이라는 것도 그럴 만한 필요성이 있을 때 쏟아내는 감정의 배설 행위가 아니던가.

2월20일 열린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 원로 작가와 신진 작가들이 모여 ‘저항의 글쓰기’를 결의했다.

상식과 양식을 갖춘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은 지난 2년간 유인촌 장관에 관한 검증과 평가를 끝냈다고 보아야 옳다. 한마디로 말해 ‘가다오 나가다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참여연대가 최근 발표한 ‘꼭 기억해야 할 40인’ 공직자 명단 가운데 ‘최악의 공직자’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 또한 장관이 자초한 일임을 혼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최장수 재임 문화부 수장(首長) 반열에 오른 것과 관련해 한국작가회의 김남일 신임 사무총장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부끄러운 기록이 될 수도 있다”라고 쓴소리를 한 것은 상식을 갖춘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떠하신가? 얼굴이라는 낱말이 ‘얼(정신)’과 ‘꼴(형태)’이 합쳐진 말이라는 점을 배우 출신인 장관이 모르지는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나는 문화예술의 가치란 내 안의, 우리 안의 ‘무지에의 의지’(will to ignorance)를 깨닫게 하는 환기능력과 수행능력에 있다고 판단한다. 무지에의 의지란 속된 말로 해서 ‘쪽팔림’을 모르는 후흑(厚黑)들의 처세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던가.

예술위의 확인서 제출 요구로 촉발된 작금의 반문화적 행정폭력은 장관 후보자 시절에 예견되었다. 유인촌 장관은 장관 후보자 시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문화에서 보이고 들리는 문화로 발전시키겠다”라고 포부를 밝힌 바 있었다. 이 말은 곧 무형의 정신적·철학적 가치에 대한 ‘추구’보다는, 대규모 물량공세로 보이고 들리는 문화 이벤트를 ‘추진’하겠노라는 문화시장화 정책의지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올해 문화체육관광부 중점사업으로 추진되는 ‘문화가 흐르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 우리나라가 〈문화비전 2012〉에서 말하듯이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리라고 정녕 확신하는가? 유인촌 장관은 문화부 수장으로서, 정부 대변인으로서, 우리말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추진’과 ‘추구’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개발’과 ‘계발’의 차이에 대해, 다시 한번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시라.

‘저항의 글쓰기’로 국격 환기할 것

우리 문인들은 예술위의 ‘확인서’ 파문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의 반문화적 행정폭력이 사라질 때까지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통해 참다운 국격(國格)이란 무엇인지를 우리 사회에 환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국격이란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만들고, 국립 예술기관에 ‘지침’을 내려 애국주의적 국가 브랜드 레퍼토리 창작물 제작을 지시하고, 국가 이미지 홍보를 위한 예산을 늘리고, G20 정상회담을 유치한다고 해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격이란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할 때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문인들은 원로 문인부터 신인 작가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이명박 정부의 반문화적 행정폭력에 맞서 말과 글을 통해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보이콧’ 운동을 의연히 펼칠 구상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 문인들은 언제나 “아직은 저항의 나이”(문동만)를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기자명 고영직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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