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8일 새벽,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중심가에 위치한 유엔 국제 게스트하우스에 무장 괴한들이 침입해 경찰 및 보안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외국인 숙소인 유엔 국제 게스트하우스는 카불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꼽힌다. 당시 외국인 20여 명이 묵었는데, 10월29일 현재 유엔 직원 6명과 무장 괴한 3명 등 12명이 죽고 9명이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게스트하우스에 침입한 무장 괴한들은 누구나 예상하듯이 탈레반이다.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사건 3일 전에 “아프간 대선 결선투표에 관여하는 자들을 죽이겠다”라고 예고한 바 있다. 그는 사건 직후, 3일 전 경고를 언급하며 “이번이 우리의 첫 번째 공격이다”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아프간 대통령 선거 결선을 겨냥해 유엔 국제 게스트하우스를 공격했다. 지난 8월20일 아프간 대선에서 감행된 부정선거의 불똥이 유엔으로 튀고 있는 것이다.

유엔이 아프간 선거 후폭풍을 겪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9월30일 유엔 아프간 부특사 직에서 해임된 미국 출신 피터 갤브레이스는 아프간 대선에 대한 유엔의 대응을 공개 비난하고 나섰다. 갤브레이스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아프간 대선에서 1위를 기록한 하미드 카르자이 현 대통령이 얻은 표의 30% 정도는 부정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부정 사례를 모두 공개하고 전면 재검표를 실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해임된 것도 아프간의 부정선거에 눈감으려 했던 유엔 고위층과 관련이 있다.

10월28일 유엔 숙소에 난입한 탈레반이 경찰·보안군과 총격전을 벌여 유엔 직원 6명 등 모두 12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위는 당시 부상자를 옮기는 모습.
유엔 직원이 부정선거 폭로

갤브레이스의 이번 폭로는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유엔이 도덕성과 신뢰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결국 카이 에이데 아프간 유엔 특사는 “아프간 대선에 대한 광범위한 부정 행위가 있었다”라고 뒤늦게 시인했다.

이렇게 유엔에 타격을 준 아프간 부정선거의 내막은 이렇다. 대선날인 8월20일에서 이틀이 지난 22일, 현지 언론인 파지와크 통신은 당시까지 개표된 451만여 표 가운데 하미드 카르자이 현 대통령이 약 71%를 득표했다고 최초 보도했다. ‘아프간 독립 선거관리위원회’(IEC) 역시 카르자이 대통령이 전체 유효 표 중 54.6%를 얻어 과반 득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카르자이가 다시 한 번 아프간 대통령으로 당선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카르자이 진영은 당선을 자축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다. 대규모 선거 부정 의혹이 불거지면서 카르자이의 대통령 당선 확정이 보류된 것이다.

대선 전부터 카르자이 측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온 압둘라 후보가 부정표 넣기, 투표율 부풀리기, 투표 위협 등 자신의 캠프에 접수된 부정선거 사례만 100건이 넘는다고 밝히며 아프간 선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투표가 이뤄지지 않은 남부 지역에서 카르자이에게 기표한 투표용지가 접수됐으며, 투표율도 부풀려져 실제 투표율이 10%인데 40%로 보고된 지역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국제 선거감시 기구인 ‘유엔 선거 민원위원회’(ECC)도 대선 당일부터 선거부정 신고가 225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소문만 무성했던 부정선거 실태가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IEC와 ECC는 9월21일 공동 성명을 통해 “수일 내로 옵서버 그룹 및 각 후보 진영을 접촉해 구체적인 재검표 및 감사 진행 계획을 설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재검표는 현 대통령 카르자이에게 너무나 불리했다. 부정선거라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겨우 과반수를 넘겨 54%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것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간 헌법에 따르면 대선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후보자가 결선투표를 치러야 한다.

ECC가 재검표를 진행하자 다양한 부정선거 방법이 밝혀졌다. 남부 칸다하르와 동부 가즈니, 남동부 팍티카 주 83개 투표소에서 나온 투표용지는 모두 무효 처리되었다. 대부분 카르자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파슈툰족 거주 지역이다. 이 지역의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바꿔치기, 대리투표 따위 부정 행위가 적발됐다. 이런 부정선거 결과 일부 투표소에서는 카르자이 득표율이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

위는 아프간 북부 도시 마자르에샤리프에서 투표용지를 검사하는 장면.
이 같은 재검표에 따라 카르자이를 지지했던 130만 표가 부정 투표로 무효 처리되었다. 그 바람에 카르자이의 득표율은 종전 54%에서 49.67%로 낮아졌다. 탈레반 공격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며 간신히 치렀던 대선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또 한 번 결선투표를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과 동맹국은 당황했다. 그동안 아프간이 선거라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절차로 정상화되기를 바라며 군대와 전비를 감당해왔는데, 부정선거가 밝혀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카르자이 진영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대선과 재검표 과정에서 외국의 간섭이 있었다. 재검표 결과도 수용하지 않겠다”라는 강경한 태도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 여론이 “원조를 받을 때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다가 부정선거에 관여하자 내정간섭을 외친다”라며 돌아서자 카르자이는 결선투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0월20일 카르자이 대통령은 존 케리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등과 함께 연 기자회견에서 “ECC의 재검표 결과를 수용하며, 2위를 차지한 압둘라 후보와 결선투표에 임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다. 오바마 정부는 재검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추가 파병이 불가하다며 카르자이를 압박했다. 힐러리 국무장관은 카르자이에게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어르고 달랬다. 존 케리 위원장은 직접 카불로 날아가 4박5일 동안 카르자이를 설득했다.

그 외에도 유럽연합(EU) 순회 의장국인 스웨덴의 카를 빌트 외무장관은 “ECC와 IEC가 결선투표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면 반드시 실시돼야 한다”라며 카르자이에게 재검표를 수용하라고 압박했다. 카르자이가 재검표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런 국제적 압박 때문이었다. 카르자이 역시 자신이 결선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지난 10월20일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사진 오른쪽)은 존 케리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사진 왼쪽) 등과 함께 연 기자회견에서 결선투표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카르자이 현 대통령과 압둘라 후보 간의 결선투표가 잘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11월7일로 예정된 결선 투표는 시간상으로도 무리가 있다. 아프간은 산악지형이 많아 투표용지를 나르는 문제부터 만만치 않다. 카불까지 투표함을 나르는 데 최장 10일이 걸리는 지역도 있다.  또한 이미 카불 북쪽에는 10월 중순부터 눈이 오기 시작해서 주민이 눈발을 헤치고 또 한 번 투표를 하는 것도 힘들다. 더군다나 부정선거에 대한 실망감으로 주민 투표율이 저조할 전망이다.

아프간 동부 쿠나에 사는 주민 바시르는 “어차피 또 부정선거일 텐데 일부러 몇 시간 걸려 투표하러 가느니 포기하는 것이 낫다. 먹고살기 힘든 아프간 사람들에게 부정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아프간의 고통스러운 겨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간의 지구별 선거 책임자 380여 명 가운데 (부정 의혹이 있는) 200명 이상을 교체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선거부정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불거진 유엔 현지 대표부 내부의 갈등과 관련해 마련한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유엔의 신뢰성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또한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선이 치러진다 해도 아프간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카르자이 대통령과 맞서는 압둘라 후보는 1차 투표에서 드러난 대규모 부정의 재발을 막자는 취지로 선거관리위원장 교체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자이 현 대통령은 “절대 수용 불가”로 맞선다. 이렇게 되면 압둘라 후보는 자신이 서방세계가 지지하는 카르자이의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후보를 사퇴할 수 있고, 이 경우 선거 파행의 여파는 계속 확산될 것이다.

또한 탈레반도 결선투표를 계기로 공격을 강화하리라 보인다. 유엔 국제 게스트하우스 습격은 첫 테이프일 뿐이고, 앞으로 더욱 가혹한 탈레반의 공격이 예상된다. 올겨울은 아프간 주민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혼란스럽고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기자명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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