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글레이저 감독.ⓒAFP PHOTO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AFP PHOTO

유대계 영국인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59)은 3월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홀로코스트(집단학살)를 다룬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담장에 바짝 붙은 목가적 저택에 사는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와 가족들의 평온한 일상을 따라가며 홀로코스트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글레이저 감독은 유대계이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비판해왔다. 홀로코스트에 분노한다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행 중인 팔레스타인 학살에도 반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마스의 (지난해) 10월7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으로 살해된 사람들이든 지금 진행 중인 가자 공격의 피해자들이든, 인간성 말살(dehumanization)의 희생자란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는 저항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수상 소감의 다른 구절이 논란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점령(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분쟁으로 몰아넣은)에 악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te their Jewishness and the Ho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일부 언론이 위의 문장에서 ‘유대인 정체성Jewishness)’의 뒷부분을 뚝 자르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발언의 뜻이 이렇게 바뀌어버렸다.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we stand here as men who refute their Jewishness.)” 이스라엘 지지자와 일부 유대인이 격분했다. 유대계인 글레이저가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홀로코스트 소재의 영화로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글레이저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딸인 메건 매케인 같은 유명인들도 X(옛 트위터) 등 SNS에 비난 게시물을 올렸다.

미국의 뉴스 사이트 복스(Vox, 3월11일)는, 수상 소감 중 논란이 된 문장 전체를 소개하면서 “글레이저 감독은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에 활용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라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세계 도처의 수많은 유대인들은 글레이저 감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민족 정체성이 극우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팔레스타인 억압에 동원되는 것을 불쾌하게 느낀다.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엔 라미 유세프, 마크 러팔로, 마허셜라 알리 등 유명 배우와 가수 빌리 아일리시, 에바 두버네이 감독 등이 ‘가자지구 휴전’을 요구하는 빨간색 브로치를 달고 참석하기도 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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