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KBS 본관 앞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의 4월 방영을 촉구하는 제2차 시민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2월28일 KBS 본관 앞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의 4월 방영을 촉구하는 제2차 시민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지난해 4월 출간된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는 세월호 생존자 유가영씨가 참사 이후 9년간 써 내려간 기록이다. 단원고 학생 325명 가운데 돌아온 이는 75명.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었고 세상을 지독히 원망하며 20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이 전부 고통으로만 남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그는 답한다. 2018년, 다른 세월호 생존자들과 함께 비영리단체 ‘운디드 힐러’를 만들었다. 자신처럼 재난재해로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돕고 있다. 세월호 생존자가 펴낸 첫 에세이는 ‘인간은 상처받고 깨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어코 환기해낸다.

KBS 〈다큐 인사이트〉의 이인건 PD도 이 책을 읽었다. 지난해 12월 담당 부장으로부터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를 기획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책이 다시금 떠올랐다. 유씨의 이야기가 세월호 10주기를 맞은 한국 사회에 위로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부장의 허가가 떨어졌고 4월18일 방영을 목표로 제작에 들어갔다. ‘바람과 함께 살아낼게’라는 가제가 붙었다. “세월호 10주기 방송은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내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 과정 끝에 나온 기획이다.” 이 PD가 밝혔다.

상황이 달라진 건 지난 2월 초다. 이제원 신임 제작본부장은 〈다큐 인사이트〉의 해당 방송에 대해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다른 참사와 엮어 PTSD 극복 시리즈로 6월 방영할 수 있게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사표를 낸 전임 본부장 자리에 새로 부임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총선은 4월10일이고 방영은 4월18일이다. 프로그램이 선거에 무슨 영향을 주느냐고 PD가 묻자 ‘총선 전후로 한두 달은 영향권이라 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섭외나 세팅을 포함해 이미 80% 정도 진행된 상황이었다.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4월 방영은 불가하다’는 본부장 측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고 제작진은 전했다.

박민 사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11월, KBS에서 프로그램 폐지와 진행자 교체가 숨가쁘게 이뤄졌다면 이번에는 제작 중이던 방송이 갑작스레 멈췄다.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의 향방을 두고 공영방송 KBS가 또다시 흔들리고 있다. 5년 차 이상인 A 시사교양 PD는 “사실상 세월호 관련 방송 제작을 하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전임 본부장과 팀·부장까지 컨펌(확인)했고 한창 제작 중인 방송을 이런 식으로 제지한 사례는 이전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간부(본부장급) 회의에서 방송에 관한 정무적 판단을 해온 것은 맞지만, 주로 자원이 투입되기 전인 기획 단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갈등이 커지리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다큐 인사이트〉 ‘바람과 함께 살아낼게’ 편은 정치인이나 유가족 대표, 세월호 관련 단체의 이야기는 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대신 참사를 겪은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내용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10년 차 이상인 B 시사교양 PD가 이번 제작본부의 결정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시기인 만큼, 이런 아이템을 준비할 땐 제작자도 굉장히 많은 부담을 느낀다. 〈다큐 인사이트〉의 세월호 10주기 방송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의 이야기로 기획되었다. 굉장히 보편적인 방식으로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법을 취한 것이다. 그조차도 회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를 외면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KBS 〈다큐 인사이트〉의 이인건 PD.ⓒ시사IN 신선영
KBS 〈다큐 인사이트〉의 이인건 PD.ⓒ시사IN 신선영

방송법 때문에 세월호 유가족 못 만나?

2월21일부터 닷새간 시사교양 PD 221명이 ‘세월호 10주기 다큐는 예정대로 4월에 방송되어야 한다’는 릴레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작 자율성이 크게 침해되는 데 문제의식이 크다. 언론노조 KBS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큐멘터리 구성상 짜여진 일정과 계획이 있는데 조금 더 지나면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든다. 그 시점에 해야만 하는, 찍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4월의 바다와 6월의 바다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다큐 출연자들은 10주기에 방영되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제작진 측에 밝혔다고 알려졌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는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를 크게 실추시켰다. 참사 당일 ‘전원 구조’ 오보를 냈을 뿐만 아니라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망자 수가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적다”라는 취지로 발언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유가족들은 영정 사진을 들고 KBS를 항의 방문했고, 긴 시간 대치 끝에 길환영 KBS 사장이 유가족에게 사과했다.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은 KBS 보도국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 편성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방송법 제정 33년 만에 첫 유죄 확정판결이었다. ‘보도 참사’라는 오명이 KBS 역사에 남았다.

일선 PD들의 반발이 커지자 보수 성향 KBS 공영노동조합은 2월20일 성명을 냈다(KBS에는 노동조합이 총 4개다. 교섭대표 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보수 성향 KBS 노동조합과 KBS 공영노동조합, ‘MZ 노조’로 불리는 KBS 같이노조다). “그날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 해난사건이었는데 좌익 세력들은 엉터리 음모론과 마타도어로 정부와 대통령을 공격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정치적 폭발력을 품은 사안으로 변질돼 있기 때문에 아이템으로 다룰 땐 더 신중해야 한다.” 6월 방영을 주문한 이제원 제작본부장은 지난 1월까지 공영노동조합 위원장이기도 했다.

2월22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를 직접 찾았다. 박민 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단원고 2학년 9반 고 진윤희 학생의 어머니 김순길씨도 그중 한명이다. KBS 앞에서 10년 만에 또 피켓을 들었다. “10년 전 KBS 사장이 사과하며 공정한 방송을 내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방송으로 전락한 것 같다.”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사무처장인 그는 KBS의 이번 결정이 참사를 또다시 정쟁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4년에 언론이 제대로 된 진실을 보도하지 않아 많은 상처를 입었다. 유가족의 상처에 다시 한번 굵은 소금을 뿌렸다.”

박민 사장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2월26일 KBS 측은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에 한 장짜리 공문을 보내왔다. “〈다큐 인사이트〉 편성 등 관련 사항은 편성책임자가 최종 결정할 사안으로 방송법 제4조 제2항에 의하여 ‘방송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귀 협의회에서 요청하신 KBS 사장과의 면담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 알려드립니다.” 여기에 언급된 방송법은 정치 권력이 입맛대로 방송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막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유가족들이 세월호 다큐와 관련해 KBS의 공식 입장을 묻는 일이 ‘방송법’에 의해 가로막혔다.

2014년 5월8일 밤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를 찾아 사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2014년 5월8일 밤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를 찾아 사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박민 사장 취임 이후 100일간 KBS에는 보도·제작 자율성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월26일 KBS는 조합원 과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국장 임명동의제를 무시한 채 시사·보도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 인사를 강행하는가 하면, 2월14일에는 내부 절차를 건너뛰고 감사실 인사를 단행해 논란이 되었다. 사람이 바뀌면서 뉴스 기조도 달라졌다. KBS가 제작한 윤석열 대통령 신년 대담에서 김건희 여사가 받은 명품 가방(디올백)이 ‘파우치’로 축소되었다. 2월22일 영화 〈건국전쟁〉 흥행 소식을 다룬 KBS 〈뉴스9〉의 보도(‘80만 관객 동원…이승만 재평가 점화’)에 대해 언론노조 KBS본부는 취재계획, 영상취재 배정 기록 등이 KBS 내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던 중 세월호 10주기 다큐가 ‘PTSD 기획’으로 바뀌었다 .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상황”

A PD는 이번 결정이 KBS 내부 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10년 전 KBS 보도 참사가 길이길이 남듯 KBS에서 세월호 10주기를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도 오명으로 남을 것이다. 제작자로서 앞으로 한 스텝 한 스텝이 가시밭길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적으로 족쇄를 채우는 대신 〈다큐 인사이트〉라는 본보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B PD의 의견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느라 잊게 되는 공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라고 배웠다. 우리가 월급을 받으면서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다. 사회적 참사를 되돌아보는 영역을 우리 스스로 축소해버리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정치적 맥락을 다 떠나서 공영방송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황이다.”

KBS 측은 ‘세월호 다큐 불방 배경’을 묻는 〈시사IN〉 질의에 “불방이 아니다. 제작본부장이 6월 예정으로 언급했던 PTSD 기획 다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기획이다”라고 답변했다. 이인건 PD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애초에 세월호 10주기 방송으로 부장에게 전달받아 진행되던 기획이다. 트라우마 기획이라고 하면 다른 팀이 제작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 말고는 없다. 세월호 기획을 6월에 방영하라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다.”

KBS 편성규약에 따라 방송의 공정성 및 공익성 훼손 논란이 있을 경우 제작본부 내 실무자와 책임자가 TV 편성위원회에서 공식 협의할 수 있다. 그러나 2월27일 예정된 TV 편성위원회는 열리지 않았다. 제작책임자 측은 ‘〈다큐 인사이트〉 세월호 10주기 방송 건’이라는 안건 명에서 세월호 10주기를 빼야 한다고 요구하며 회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작책임자 측은 2월27일 입장문을 통해 “전임 본부장이 가승인한 방송 아이템은 ‘천안함 생존자 PTSD 극복기’도 방송하는 것을 전제로 한 ‘세월호 생존자 PTSD’ 방송이지, ‘세월호 10주기 방송’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다른 참사 생존자 PTSD 극복기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며 전체 준비 기간 등을 고려해 6월 이후에 방송함이 타당하다”라고도 덧붙였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편성위 무산에 따라 긴급 공정방송위원회 개최를 사측에 요구했으나, 2월29일 KBS 사측이 불참하면서 긴급 공방위도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KBS 앞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를 4월에 방영하라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인건 PD는 이 자리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가 세월호 다큐를 4월에 방영할 수 없다는(6월로 미루라는) 제작본부장의 결정에 따랐다면 저는 더 이상 KBS에 다닐 이유도 없고, 시청자 앞에서 떳떳할 수도 없다. 제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프로그램과 시청자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이 결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